찬란한 떨어지는 빛
<히다마리 - 찬란히 떨어지는 빛> 리뷰
김화자
무겁게 깔린 먹구름 아래 회색 빛 파도가 일렁이는 바다, 감미로운 봄바람에 살랑거리는 파스텔 빛깔의 꽃들, 하늘과 바다의 경계마저 지워버리고 시원하게 퍼붓는 푸른 빛 소나기로 물든 바다, 수풀더미, 혹은 나무 그림자와 흩날리는 하얀 꽃잎 사이에서 빛을 발하는 자서전들, 허름한 숙소의 창문틀에 가난한 여행객의 피로를 풀어 준 빈 맥주 깡통, 우연히 포착된 듯한 인물사진들은 하나의 연작이나 주제로 묶기에 서로 어떤 연관도 없어 보이지만, 각 사진마다 미묘한 빛의 흐름이 '그곳에 있었던 존재'를 투명하게 보여준다. 박진영은 왜 이번 전시명을 '찬란히 떨어지는 빛'이란 뜻의 일본어 <히다마리>로 지었을까?
눈부신 디지털 기술의 발달과 매체들 간의 적극적인 소통, 인공적인 연출, 신표현주의적인 형상과 거대해진 작품의 크기, 감쪽같은 허구의 이미지, 빛의 흔적으로서의 사진의 태생적 특징 너머 개념화로 인해 점점 더 난해해져가는 현대 사진 앞에서 작가는 잠시 숨을 고르고 '사진의 진정한 본질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진 것이다. 사진이란 무엇보다도 대상의 발견이고, 그 대상으로부터 발산된 빛의 자국이므로, '사진적인 것'은 '빛'을 매개로 대상과 물리적으로 연결 되어 있다는 사진이 갖는 본래의 특성에 주목한 것이다. 그렇다면 <히다마리>, 즉 '찬란히 떨어지는 빛' 이란 전시명에 의해 작가가 성찰한 사진의 태생적 특징을 빛의 감각적, 물리적인 속성과 초월적인 속성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첫째, 조용히 사물에 닿아 비추면서 색, 질감, 형태를 깨우고 사물 하나하나에 생명을 불어넣어 존재하게 해주는 빛의 물리적 속성을 바르트가 사진의 "살적인 환경이고 피부"라고 말한 것처럼, 사진은 대상으로부터 발산된 빛의 자국이다. 평범한 사물이 빛을 매개로 자국으로 변형되어 존재했던 그 무엇인가를 가리키는 지표적 속성은 섬광처럼 찬란하지만 덧없이 사라지는 순간에 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빛의 물리적 효과로 나타나는 사진의 지표적 특징이 대상의 존재는 증명할 수 있지만, 그 자국의 대상과 완전히 닮았는지는 알 수 없다. 즉 빛의 물리적, 감각적 속성은 대상과의 닮음 보다는 대상의 존재 자체가 놓였던 '상황'을 보여주므로 사진의 사실성은 절대적인 유사함에서 벗어난 지시적 사실성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둘째, 빛은 물리적일 뿐만 아니라 초월적이기도 하다. 대상들이 놓여 있던 '상황'과 빛에 의한 물리적 연결은 그 상황에 대한 경험을 촉발시키는 환유적 충동을 유발할 때 사진은 비로소 지시대상의 연결성을 넘어서게 되는데, 이 때 야기된 섬광, 격렬한 변화는 정서적인 시선을 자극하고 찌른다고 볼 수 있다. 이 순간의 빛은 바르트에 의하면 "(...) 내 안에서 작은 전복, 사토리, 즉 어떤 공(空)"을 야기한다는 것이다. 바람에 나부끼는 풀밭 속에서 빛을 발하는 조치훈의 자서전, 마치 땅바닥에 벚꽃이 핀 것처럼 하얗게 떨어진 꽃잎들과 나무 그림자 위에 놓인 기타노 다케시 감독의 자서전 사진들에서 빛은 삶과 생명의 찬란하지만 덧없는 시간적 속성과 닿아있다. 인생을 반추하며 쓴 자서전에서 청춘이란 찬란했던 봄날의 섬광처럼 순간적인 것이며, 이 때 빛은 지나간 시간을 뒤돌아보게, 혹은 내면을 응시하게 해 주는 성찰의 빛이다. '찬란히 떨어지는 빛', 즉 섬광에 의해 사물은 이미지로 되고, 또 한 번의 섬광이 그러한 연결성을 깨고 각자의 상처를 통해 자신만의 홀연한 깨달음에 이를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결국 빛을 매개로 한 사진의 지표적 속성은 실재하는 대상을 포착하여 지시하기 때문에 다른 예술들에게는 필연적이라 할 수 있는 코드 없이도 생성될 수 있다. 즉 사진은 특별한 변형이나 효과 없이도 빛의 자국 그 자체로 은유적, 환유적 의미를 지닐 수 있다. 오늘날 가장 대중적인 매체인 사진이 예술현장에서 주요 매체가 되면서 사진가는 물론 다른 분야의 전문 작가들도 사진을 표현매체로 선택하는 지금 이 시점에서, 박진영은 '사진적인 것'이 무엇인가를 되짚어 보는 시간을 통해, 늘 새로운 문제의식과 개념적인 사유를 효과적으로 시각화하기 위해 강박증에 시달리고 있는 작가들에게 '왜 사진을 찍는가?', '사진이란 매체를 통해 무엇을 보여주려 하는가?"라는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문제에 대해 조용히 자문하게 해주는 의미 있는 전시였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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