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가의 세 가지 이름
- 박진영의 사진
박찬경
1.
박진영의 카탈로그에 실린 작가 노트에 이런 재밌는 말이 있다. "어쩌면 National Geography의 일본계 미국인 마이클 야마시타 정도의 저명한 사진가가 아니라, 듣도 보도 못한 Area Park이란 이름의 찍새라 무시해서 그런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박진영은 Area Park의 실명이다. 요즘도 쓰는 말인지 모르겠지만, 예전에는 경찰을 '짭새'라고 불렀다. 범죄세계와 운동권에서 공히 사용되었던 '짭새'는 정확히 발음하면 '짭쌔'이다. '짭쌔'라는 말을 통해 경찰집단과 공공성의 관계는 아주 절단이 나버린다. 대신에 경찰, 특히 사복형사의 이미지는 하찮은 존재이면서 약간은 비열하고, 그러나 듣기에 따라서는 정겹기조차 한 사사로운 개인, 거대기관의 말단 신경세포가 되어 도시에 뿌려진, 비인간적인 조직 수단의 하위단위로 격하된다. 경찰이 집단이고 뇌라면, 짭새는 개인이고 손발이다.
사진이 생겨난 이래, 짭새와 사진가의 관계는 매우 깊다. 아니, 짭새와 사진가는 그 이름부터 친연성을 지닌다. 잡는 것이나 찍는 것이나 대상을 포획한다는 뜻으로 보면 다를 바가 없다. 또 대상을 붙잡기 위한 강박적인 노력과, 이에 따르는 직관력, 순간판단력을 생각해봐도 그렇다. 다큐멘터리 작가의 경우에는 특히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숨기거나 습관적으로 거짓말을 해야 하는 상황도 비슷하다. 직업상 강한 자의식을 가질 수밖에 없지만, 그렇게 떳떳하게 자신의 행위를 자랑하기는 뭣하다는 것도 그렇다. 짭새가 공권력의 지지를 받는 반면, 찍새는 때로 짭새보다도 더 비열해져야한다. 찍새의 카메라는 수갑과 달라서, 누군가 걷어차면 차여야하는 것이다. 짭새는 200mm 망원렌즈를 사용하기도 하지만, 찍새는 완력이나 수갑이나 영장을 사용할 수 없다. 찍새는 상황이 도래할 때까지 더 기다려야하고, 그 상황이 도래했을 때는 더 빨라야한다. 다음 기회가 별로 없다.
카메라를 들고 서울을 배회하는 박진영의 모습은 영락없는 '찍새'이다. 박진영만 찍새가 아니라, '사진예술가'들이 아무리 항의한다 해도, 앙리 카르티에-브레송도 찍새이고 다이안 아버스도 찍새이고, 위지Weegee는 대표적인 역사적 찍새이다. 아라키? 낸 골딘? '결정적 순간'이란 것도, 훌륭한 찍새아니면 할 수 없는 말이다. 잘 나가는 어떤 유명 사진가들도 사진 찍을 때는 결국 찍새이다. 즉 정도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어느 정도는 카메라 뒤에 숨어야하는 면에서 보자면 비열한 존재이다. 대상에 대한 윤리적 책임? 글쎄다. 사진가의 윤리성이라는, 예술학적인 얘기도 할 수 있겠지만, 사실 카메라가 발명되었을 때 이미 사진가의 찍새로서의 운명은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에 사진가를 너무 탓할 수만은 없다. 문제는 그 운명을 얼마나 잘 활용하느냐는 것이다.
박진영은 작은 카메라를 들고 스냅사진을 마구 찍어대는 스타일이 전혀 아니다. 오히려 대형카메라를 삼각대 위에 놓고 필름 값을 걱정해야하는 작가이다. 이런 행위의 면모만을 본다면 그는 찍새는 아닌 것 같지만, 장소와 인물, 날씨를 파악하고 선정하는 기민함, 또는 일상의 평범함 속에서 색다른 순간을 발견하는 능력 등의 사진가-찍새로서의 전통적인 미덕은 두루 갖추고 있다. 소위 '타고난 사진가'라는 오염된 말을 써야 한다면, 그는 이런 유형의 사진가이다. 예를 들어 '대치상황-조폭과 전경'이라는 흑백 사진을 보자. 말하자면 깍두기와 전투경찰이 길목에서 대치하는 장면인데, 그 배경에는 '더불어 사는 곳'이라는 간판이 약간 초점을 잃은 상태로 보인다. 이 사진에서 폭력배와 경찰의 시선은 모두 사진가를 향하고 있다. 여기서 깍두기와 짭새의 눈에 보이는 사진가는 '사진작가'나 '사진예술가'가 아니라, '찍새'인 것이다. 그러니까 이 더불어 사는 세상이란 깍두기와 짭새와 찍새가 더불어사는 세상이다.
깍두기와 짭새만이 아니라, 양아치, 범생이, 불효자, 기지배, 내논 자식, 범생이, 배달맨 등은 찍새의 눈에만 잡히는 대상이다. "Seoul.. a Society of Gap"과 "Boys in the City'라는 박진영의 첫번째, 두번째 카탈로그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체로 이렇다. 이 시리즈에서, 사진가의 보편적이고 생래적 '찍새성'은 보다 적실한 한국적인 코드를 얻게 된다. 예를 들어, 올림픽 경기장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두 중학생은 어깨동무를 하고 있다. 거대한 스타디움을 배경으로 더욱 작아 보이는 중학생은 '우정'의 이름을 재빨리 얻는다. 여기서 우정이란 70년대 라디오에 보내지는 우편엽서 속의 사연이나, 크리스마스카드 속의 그림과 같은 것이다. 무지한 경쟁과 폭력이 난무하는 한국적 훈육기관으로서의 학교에 대한 경험이나 기억이 없이, 도시 속의 아이들 사진을 흥미롭게 감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2.
만약 '찍새'라는 말이 영 거슬린다면, '찍사'라는 말도 있다. 아마도 찍새라는 말은 찍사를 더 비속하게 표현한 것일 터이다. 찍사의 이미지는 찍새의 게릴라적 행위보다, 암막을 덮어쓰고 대형카메라를 응시하는 사진가의 모습에 가깝다. 그렇게 보면, 어떤 순간에만 드러나는 장면을 포획하는 찍새도 박진영에 어울리지만, 장면을 찬찬히 훑어보고 정확한 노출과 구도를 선택하는 박진영 역시 어울린다.
'3초간 정지된 소년들'은 거리 한복판에서 말 그대로 3초 동안 정지하고 있는 아이들을 찍은 것이다. 3초 동안 사진가의 권위가 이 소년들뿐만 아니라 이 광경을 장악하고 있는 셈이다. 아이들을 제외한 거리의 보행자들은 모두 흐릿하게 번져 보이고, 주인공이 된 아이들은 거리 저편에 보이는 상가 매장의 마네킹처럼 형상이 온전하다. 그렇다고 아이들이 마네킹처럼 움직이지 않는 죽은 사물이 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아이들은 흐릿해진 거리의 사람들, 즉 지나치게 움직이는 사람들과 전혀 움직이지 않는 마네킹 사이에 위치한다. 이는 전반적으로 아이들의 환경으로부터의 고립을 나타내지만, 동시에 아이들과 사진가의 마주침, 아이들과 사진가 시선 사이의 격렬한 대화를 낳는다. 이런 일종의 시간적 공백이랄까, 흐름의 중단, 일종의 적막은 바쁘고 민첩한 찍새가 아니라, 복잡한 현장에서 떨어져 나와 오직 카메라 속의 사진현실에만 냉정하게 주목할 수 있는 찍사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찍은 '소년의 꿈'은 더 찍사적인 사진이다. 이 사진은 파노라마의 시각적인 구성을 백분 활용해서, 시소를 타고 있는 가족(조각)의 수직적인 동세와 옆으로 긴 프레임, 횡으로 움직이는 보행자의 흔적을 충돌시킨다. 고정된 조각이 움직임을 표현한다고 해도 움직이지 않는 것이라는 사실, 즉 거짓말을 하는 것이라는 사실이 이처럼 역설적으로 드러나기도 어렵다. 게다가 사진가를 결정적으로 도와주는 것은 'Happy Time' 이란 글씨가 박혀있는 식당 광고 포스터이다. 이 사진은, '스톱 모션 속에서 영원히 행복을 누리는 것은 이 조각뿐이다', 라는 식의 언어적 해석을 다그친다. 물론 사진의 알리바이는 그러한 언어적 구성에 앞서, 실제로 그런 상황이 존재한다는 사실로 성립하겠지만. 찍새에게도 알리바이가 있지만, 역시 찍사만 못하다. 찍새의 사진에 대해서는 여전히 우연히 얻어진 '장면'이 아닐까라는 의구심이 든다. 반면에 찍사의 사진은 너무 확고하게 준비된 장인적 의지의 소산이기 때문에, 알리바이가 확실하다. 예를들어 '모 회장의 자살현장'은 하나의 완벽한 세트를 재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카메라 속에 카메라가 보이는 일종의 액자구조인데, 갈대가 펼쳐져있는 아름다운 강가의 참변 사진치고는 참으로 감정을 끌어들일 여지가 없는 '칼 같은' 사진이다. 실제로 이 사진을 찍을 때, 한 장의 필름 밖에 남지 않았다고 한다. 박진영은 '내가 이 장면을 놓치면 사진가가 아니지'라고 다짐하고 찍었다고 한다. 이 때 놓친다는 것은 뭘까? 만약 놓친다면 뭘 놓친다는 것일까? 이 사진의 경우엔, 현실이 사진과 같아지는 어떤 장면이 아닐까싶다 - '못 믿겠다고? 그럼 이 사진을 봐라.' 도대체 이런 현실 같지 않은 일이 이렇게 버젓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이 사진만큼 선명하게 제시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현실 같지 않은 것이야말로 지금 현실의 특징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이것은 사진의 알리바이(사진이 의미의 구성이기 이전에 현실이라는 알리바이)가, 어떤 도를 넘어 알리바이 이상의 지위를 얻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탄핵가결 순간의 국회'와 '하루평균 40만원 버는 Serah' 처럼 마치 마주보고 있는 것 같은 사진들에서도, 아예 현실이 사진 이미지를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심지어 '한달 평균 120만원 버는 K모씨'는 합성사진처럼 보일 정도로, 이미지가 되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거기에 있다. 주제는 전혀 다르겠지만, 양상은 '타겟 1.2 가상의 평양'에서도 같다. 아마도 이러한 현상은 사진기술이 발달하면 할수록 심해질 것이고, '찍사'의 지위는 아마추어 사진기술의 엄청난 성장에 계속 위협받게 될 것이다. 또 다른 한편, 공간현실과 건축환경이 점점 더 이미지와 닮아갈 수록 사진은 그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 있을 수 없을 것만 같은 현장을 찾아 나서게 될 것이다. 그래서 박진영 사진 중에서도 '모 회장의 자살현장'이나 '에어쇼 친절한 제품시연', '황해도 투어'에서 보이는 액자구조가, 단순히 사진 속의 사진행위라는 하나의 알려진 장르 이상으로 흥미롭게 해석될 여지가 있어 보인다. 또 최근 일본에서 찍은 사진에서 아마추어 사진 동호인들이 누드모델 앞에서 취하는 태도는, 동시에 대형카메라를 들고 나타난 프로 찍사에 대한 어정쩡한 태도이기도 하다.
이것은 그의 대다수 인물 사진들에서, 사람들로 하여금 카메라를 대면하도록, 어느 정도 모델이 될 것, 즉 주체가 능동적으로 '사진화할 것'을 요구하는 것에서도 같은 맥락 안에 엮어볼 수 있다. 물론 인물이 찍사를 바라보는 사진은 인물이나 그룹사진의 관습이고, 그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박진영의 사진에서는, '황해도 투어'의 여인이 카메라 앞에 서있는 것처럼, 또는 '체어맨' 앞에서 휠체어를 탄 채 시위를 벌이는 장애인처럼, 주변환경과의 대조 속에서 드러나는 경향이 있다. 물론 인물들은 동대문이나 평택이나 중랑천에 있을 법하고, 그 장소에 속해있는 개인이나 집단일 것이라고 추측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왠지 이 인물들이 해당 장소와 '자연스럽게' 만난다거나 필연적인 관계를 지닌다거나, 더 나아가서는 내적으로 어울린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이러한 인물과 환경의 분리나 대조는, 찍사와 인물 사이를 더 강하게 엮어준다. 주요인물 주변의 인물을 흐린다거나, 인물을 물리적으로 고립시킨다거나, '고립의 정치학'을 사용하는 일인시위자를 선택하는 것은 모두 이런 느낌, 이미지가 되어 우리 앞에 나타난 것과 이미지가 되기 위해 포즈를 취하는 그 실제 인물 사이에 어떤 벽도 이제 남아있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것 같다.
3.
찍새와 찍사의 구별은 편의상의 도구일 뿐, 그것이 어떤 실질적인 위계나 엄격한 범주로 구분된다는 말은 물론, 당연히 아니다. 오히려 모든 사진행위의 두 측면, 빠르게 변화하는 대상 앞에서 초조하지만, 그 초조한 순간이 오기를 인내심을 갖고 기다리거나 찾아내고 준비한다는 사진 행위의 두 양상을 적당히 은유할 수 있다는 면에서, 위계가 있기 보다는 양면적이라는 말이 맞겠다. 찍새가 많이 걷고 발이 빠른 다큐멘터리 사진가를 지시한다면, 찍사는 별로 움직이진 않되 손가락이 빠른 '예술' 사진가를 지시한달까. 그런데 여기에 '사진작가'라는 말이 붙으면 얘기가 조금 복잡해진다.
도대체 찍사와 작가의 차이는 뭐란 말인가. 물론 우리는 어떤 예술사회학적인 의미의 위계를 그리면서, 기술자-찍새, 아마추어 예술가-찍사, 예술가-사진작가라는 식으로 구분할 수도 있겠다. 저널리즘, 사진관, 화랑, 미술관 등으로 발표되는 장소에 따라 구분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낸 골딘이나 아라키야말로 찍새같은 사진가라고 '찍새'를 재정의하면, 이런 과거의 관습적 구분은 아무 의미도 없고 근거도 없다. 물론 박진영 자신은 당시 무명 사진가의 설움을 토로하면서 찍새라는 표현을 쓴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보자. 사진가가 찍새가 되지 않고 조수에게 커피나 타오라고 하면서 셔터만 누른다면 그게 무슨 좋은 사진가가 될 것인가.
진짜 문제는, 그렇다면 누가 '작가'의 지위를 수여받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것이 좋은 지위인지도 모르겠고, 왜 그런 지위가 필요한지도 알 수 없다. 그러나 좋건 싫건 어찌 되었건, 사람들은 작가라고 하면 찍사와 구별한다. 그걸 구별하지 말라고 해도 끝까지 구별하는게 사람들이므로, 우리는 차라리 작가란 누구인가를 재정의해서, 그러한 개념들 속에 구속되어있는 위계적 잔재를 청산하는 편이 현실적이다. 나는 작가를 '어떤 윤리적 미학적 의지를 지니고 당대의 문화적 책임에 응답하려는 사람'이라고, 다소 장엄하게 정의하고 싶다. 그러면 더 어려운 질문이 나온다. 과연 사진가는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사진가에게 기록이나 열심히 하라고 말했던 보들레르가 옳은 것은 아닐까?
박진영이 청소년을 찍은 사진 시리즈 중에는 '아파트에 둘러쌓인 학교'와 같은, 정황을 설명해주는 사진이 끼어있다. 고층 아파트의 숲에 둘러싸인 이런 학교에서 도대체 뭘 배운다는 것인지 한심하다는 얘기이다. 그런 시사적 비평이 하나의 작가적 의지와 발언으로까지 상승한 어떤 '복합적 단순성'을 이 사진은 전해준다. 또 '동대문 쇼핑타워'와 마주치는 '폐허 속 부처'는 이 모든 (사진)행위의 에필로그로서, 서울의 시간감각과 그 윤리적 본질이 무엇인지 정확히 지시해준다. 사진가가 굳이 '예술가'여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런 사진은 정말 '예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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