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은, 그러나 끝내야 하는 게임

박후기, 시인


기록이라는 측면에서, 사진은 '사실'에 가장 근접한 수단인 동시에 반대로 '사실 왜곡'에도 가장 적합한 장르라고 말할 수 있다. 작가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대상에 접근하는가에 따라 사진은 다양한 스펙트럼을 지닌다. 피사체를 '포착'하고 다시 그것을 카메라로 담아내는 행위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곧 작가의 '의도 범주' 안을 벗어나지 못한다. 물론 작가의 의도가 담긴 결과물을 보는 모든 사람들이 작가의 의도를 읽어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보도사진과 달리 다큐멘터리 사진은 대개 눈에 보이는 '사실'보다 '상징'에 더 관심을 쏟는다. '한 장의 사진'이라는 말이 갖는 의미처럼 어떤 상징성을 부각시켜 주의를 환기시키지만, 사실 작가는 그토록 무수한 '상징'보다 그 상징의 배경인 '현실'에 대해 말하고 싶은 것이다. 식민지배와 전쟁, 그리고 분단의 시대를 지나오면서 우리는 수많은 '금기'에 길들여져 살아왔으며, 레드 콤플렉스(Red Complex)로 대변되는 그러한 금기는 아직도 우리들의 삶 곳곳에서 우리의 몸과 의식을 통제하고 있다. 달라진 것은 다만 총칼이 제어하던 일을 자본이 대체했다는 것뿐, 우리는 아직도 편협한 이데올로기와 사대주의적 능욕에 길들여진 채 제 살을 깎아 먹으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미국이라는 거대 자본의 집합체가 지배하고 있는 세계는 지금 전쟁과 죽임의 악순환을 되풀이하고 있다. 그 정당성을 의심받고 있는 '테러와의 전쟁'을 빌미로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과 공포의 구렁텅이로 몰아넣고 있다. 전쟁과 혼란만이 자본의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방법으로 여기고 있는 듯하며, 지구상의 어떤 나라도, 특히 제3세계 국가들일수록 이러한 자본의 논리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부시로부터 '악의 축'이라고 거론된 북한만 해도 최근 핵 문제를 빌미로 테러와의 전쟁에 또 다른 제물이 될 가능성이 점점 높아지고 있는 이즈음, 우리는 외세에 의해 두 동강 난 채로 60년 세월을 서로 피 터지게 싸우고 있는 것이다. 이젠 '새로울 것도 없는 것'처럼 인식되고 있는 분단이야 말로 사실 이 땅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의 운명을 좌우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그 동안 많은 예술가들이 작품을 통해 자본 지배 하에서의 국가 종속과 분단 고착에 대해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했다. 특히 사진 분야에서 최근 일단의 젊은 사진가들을 주축으로, 분단 및 미국 자본 주도하의 세계화가 가져온 폐해들이 작품을 통해 날카롭게 지적되고 있다. 노순택, 박진영(Area Park) 등이 그들이다. 그 중에서도 Area Park의 일련의 작업들, 그 중에서도 이번 전시의 테마인 'The Game'은 분단과 이데올로기의 잔재들을 통해 우리의 분단 현실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이 글을 쓰는 내내 필자의 머릿속에는 다큐멘터리 사진가 세바스티앙 살가도(61)의 '코렘 캠프의 피난민들'이라는, 삭막한 모래 바람 속을 걸어가는 에티오피아 난민 가족의 무표정한 얼굴들이 떠올랐다 지워지곤 했다. 말이 필요 없는, 그러나 보는 이로 하여금 충분한 감상의 여지를 남겨 놓고 있는 한 장의 흑백 사진을 통해 필자는 이미 그들의 고단한 현실을 읽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의 현실이 그들의 그것과 닮아 있다는 느낌과 함께.
   살가도보다 유명하지는 않지만 자기만의 색을 가지고 고집스럽게 부조리한 현실을 사진에 담아내고 있는 사진가가 바로 Area Park이다. 그의 사진은 분단과 이데올로기의 상징물들을 통해 분단 현실에 대해 구체적으로 발언한다. 하지만 작가의 의도가 보는 이의 느낌을 구속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점이다. 필자를 비롯해서 이 땅의 많은 예술가들이 현실과 미학의 경계에서 수없이 고민을 거듭하게 마련인데, 그는 고민을 넘어 조율을 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드는 것이다. 자칫 진부하게 들릴 수도 있는 분단이나 이데올로기의 문제들을 미학적인 긴장을 놓지 않음으로써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는 작품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지극히 뻔해 보일 수도 있는 이미지들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만만치 않은 무게를 담고 있다.
   9월초, 인사동에서 그를 만났다. 기존 작품이 인쇄된 도록 두 권과 이번 전시회에 걸리게 될 작품이 프린팅 된 인화지 몇 장을 건네받았는데, 모두 칼라 이미지들이었다.
건네받은 사진 첫 장에 필자도 아는 얼굴이 등장했다. 반갑다는 생각보다 가슴 한 구석이 먹먹해져 오게 만드는 그 분은 지금 미군기지 확장으로 살던 집에서 쫓겨날 위기에 처한 평택 대추리 주민 황필순 여사다. 아들인 김지태 이장은 감옥에 가 있고, 얼마 전 경찰과 국방부가 고용한 철거 용역들에 의해 마을 빈집들이 강제 철거를 당하기도 했지만 아직 굳건하게 집을 지키고 계시는 분이다. 미군기지 확장을 위해 수백만 평의 옥토를 바치는 것도 부족해 평생 그 땅에서 농사지으며 살던 사람들을 쫓아내고 있는 것이다. 군부대 안 감시탑과 그 아래 장 구경하듯 힐끔거리며 쳐다보고 있는 대한민국 경찰들을 배경으로, 얼핏 이 나라의 분단과 아무런 상관이 없을 것만 같은 촌로들이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다. 이 게 바로 우리의 현실이며 자본과 수구 기득권층이 즐기는 게임의 배경 화면인 것이다.
   대추리 사진을 뒤로 넘기니 이번엔 매향리 사격장이다. 지금은 폐쇄된 농섬 사격장의 상흔들이 터지지 않은 불발탄과 함께 앙상한 모습으로 드러나 있다. 분단은 현재 진행형이고, 언제 터질지 모르는 불발탄처럼 우리는 전쟁의 위험에 시달리며 살아간다. 그는 매향리 사격장 사진을 통해 현재 진행형인 분단과 그 잔재를 드러냄으로써 전쟁 위협의 한 축인 미군의 존재를 부각시키고 있다. 실제로 매향리 사격장을 포기한 미군은 최근 군산 앞바다에 있는 직도를 새로운 사격장으로 만들어 줄 것을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다.
   또 다른 사진 속에는 총알구멍으로 벌집이 된 군인 모형이 서 있는 전방 어느 숲속의 사격장 모습이 담겨 있다.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총알구멍으로 벌집이 된 군인 모형은 북한 군복을 입고 있다. 이들이 타깃으로 서 있는 모습인데, 그 자체로 분단의 가장 극명한 상징성을 지니고 있다. 같은 민족끼리, 이 땅에서 외세의 대리전을 치러야 할 위험이 점점 다가오고 있다. 이러한 무서운 현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이 사진은 아이러니를 넘어 두려움과 서글픔마저 들게 한다.
   그리고 다른 사진에는 옆구리에 책을 낀 이승복 동상이 부서진 폐교를 배경으로 서 있다. 이승복 소년이 아직도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외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여전히 우리 사회가 편협한 이데올로기의 구속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리라.
   또 한 장의 사진은 임진강 통일전망대의 모습이다. 북녘 땅이 훤히 내다보이는 전망대에서 연인으로 보이는 남녀가 강 건너 북쪽 하늘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분단의 현장이 기념사진의 배경이 될 만큼 분단 상황에 익숙해져 있는 우리의 세태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명동 길거리를 배경으로 서 있는 세 명의 탈북자들은 또 어떤가? 탈북자라고 말해주지 않는다면 이들이 탈북자라는 사실을 아무도 모를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탈북자라고 지칭되는 순간, 우리는 이들을 이데올로기의 색안경을 쓰고 바라보게 된다. 사진 속에서 이들은 어딘가 모르게 주변 상황과 분리된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동적(動的)인 주변 사람들과 달리 이들의 모습은 정적(靜的)이다. 동일성의 상실이야말로 분단 극복의 가장 큰 걸림돌이라는 것을 그는 이 사진을 통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작가 스스로 이번 전시의 제목을 'The Game'이라고 지칭했듯이, 어쩌면 우리는 결말이 뻔히 보이는 카드 게임에 떠밀리듯 끼어들어 무모한 레이스를 펼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세계화라는 이름으로 전 세계를 자신들의 좌판으로 만들고 있는 거대 자본들은 이제 우리에게도 자신들의 게임에 올인 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 사회의 소수 기득권층에게 개평을 떼어 주고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베팅'에 무조건적인 '콜'을 외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사진가 Area Park은 이러한 부조리한 세상에 과감하게 맞짱 뜨는 사진가이다. 자칫 무모해 보일 수도 있겠지만 무모한 발걸음이 새 길을 만드나니, 부디 뒤돌아보지 말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