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ea. Park의 도큐먼트 혹은 일상의 이면들

최봉림, 사진평론가


롤랑 바르트 Roland Barthes는 "촬영자의 본질적인 행위는 어떤 사물, 혹은 어떤 사람을 놀라게 만드는 것이라고 상상한다." 그에 따르면 사진이 주는 "첫 번째 놀라움은 진귀함 (물론 대상의 진귀함)에 대한 것이다. (...) 두 번째의 놀라움은 그림을 통해서도 잘 알려진 것인데, 흔히 보통사람의 눈으로서는 포착하여 고정시킬 수 없는 동작의 순간을 재현시키는 것이었다. (...) 세 번째의 놀라움은 수훈적인 일에 대한 놀라움이다. (...) 해롤드 에저튼은 떨어지는 우유방울을 백만 분의 일초의 노출속도로 촬영했다. (...) 네 번째의 놀라움은 사진가의 기술적인 교란으로부터 기대되는 놀라움인데 이중 인화, 기형적인 이미지 결점의 의도적인 이용 (이중 노출, 초점을 맞추지 않은 사진, 원근법의 교란) 등이 그것이다. (...) 놀라움의 다섯 번째 유형은 의외의 것을 발견했을 때의 그것이다"

예술 사진이 됐건 소위 다큐멘터리 사진이 됐건, 혹은 작가의 사진이 됐든 아마추어의 사진이 됐든, 한국 사진의 대부분은 바르트가 말한 '놀라움'을 창출하는데 전념했다. '머리가 두 개인 사람'을 찍으려 했고, '순간적인 행위를 포착하여, 재빠르게 움직이는 장면을 결정적인 순간 속에 고정'시키려 했다. 80년대, 90년대 몇몇 유학파 작가들은 네 번째의 놀라움을 보여주기 위해 일명 '만드는 사진'에 몰두했다. 여전히 다큐멘터리, 저널리즘 작가들은 '스키복을 입은 아라비아 왕자'를 찾기 위해 일상과 동떨어진 유별난 곳들을 찾아다닌다.
   박진영(Area.Park)의 도큐먼트는 '곡예사처럼' '온갖 종류의 놀라움'의 생산과 '흥미의 법칙'에 도전하는 다큐멘터리 사진의 전통을 부인하고, 놀라움을 주기 위한 사진의 관행을 전복한다. 그의 도큐먼트는 보통 사람의 눈으로서는 포착할 수 없는 진귀한 순간도, 백만 분의 일초의 노출 속도도, 이중 노출, 빗나간 초점, 원근법의 교란도 없다. 비근한 일상을 느린 셔터 속도로 심도 깊게 정확히 기록하는 것이다. 흥미를 유발시키는 사건은 일어나지 않는다. 박진영은 퇴근 길 동아일보 게시판 앞에서 탄핵 반대 시위의 개시를 기다리며 신문의 보도 추이를 살피는 일군의 시민들의 모습을 담을 뿐이다. 그가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민족주의의 성지에서 볼썽사납게 노닥거리는 노인들을 내쫓기 위해 벤치를 말끔히 없앤 탑골공원의 썰렁한 장면이다. 그렇지 않으면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진 이후, 혹은 극적인 행사가 시작되기 이전의 일상적인 풍경들이다. 작가는 전 대우건설 회장이 한남대교에서 자살한 이후 한 방송사 보도진이 현장을 취재하는 장면을 덤덤히 기록할 뿐이다. 광화문에서 시위를 대비하는 전경들의 평범한 얼굴을 중심으로 카메라 앵글을 조절할 뿐이다. 토요일 오전, 타인의 존재, 타인의 시선은 아랑곳 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경주마, 내기의 결과에만 시선을 집중하는 소시민들의 기대에 찬, 허탈한 표정들이 박진영이 애호하는 풍경이다.
   특정 개인(들)을 모델로 한 도큐먼트 작업 역시 마찬가지이다. 한국의 거리에서 흔히 마주치는 평범한 개인들이다. 누구나 알 것 같고, 알고 있는 듯한 낯익은 사람들이지만, 정작 아는 것이라고는 전혀 없는 거리의 사람들이다. 이런 인물 사진에 만약 스펙터클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사진에 결부된 텍스트가 밝히는 사실의 폭로에만 있을 뿐이다. 어찌 보면 폭로랄 것도 없다. 대충 알고도 있는 것 같고, 몰라도 되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심심풀이 퀴즈게임의 정답처럼 보이는 사실일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하찮은 사실이 모델의 노동현장과 더불어 정확한 액수로 제시될 때, 우리는 한편으로 궁금증의 기이한 해소를 맛보며, 또 다른 한편으로 부조리한 한국의 노동현실을 숙고하게 된다. 다시 말해, 박진영의 도큐먼트는 일당 3만원에서 40만원에 이르는 비정규직 임금 편차의 형성 기준에 대한 의구심을 자극하며, 도심의 거리에서 기이한 복장과 행동으로 시선을 끄는 광고 비정규직을 양산하는 한국 자본주의의 파행적 구조를 다시 한번 반성하게 한다. 한 겨울, 싸구려 빨간 코트에 휘장을 두르고 있는 4명의 여성이 보도를 점령하고 서있는 파노라마 사진은, <신장개업>이라는 사진제목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개업식의 부조리한 관례와 이에 동원되는 뻔뻔스런 시각적 장치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업주 혹은 이벤트 회사 스스로가 마련한 '축 발전'의 화분과 화환들, 소음 공해를 내는 오디오 설비, 그리고 댄서들과 함께 도로 교통법을 위반하는 여러 기체(氣體) 광고들은 한국 자본주의의 천민성을 드러내는 물증들이다. '신장개업'과 관련된 이 시각 정보들에 작가는 눈으로는 확인할 수 없는 또 다른 정보를 부기한다. 즉 <일당 12만원씩 버는 댄싱팀 아마존 (20대 초중반)>이라는 사실을 기록한다. 이 텍스트는 '임금 정보'라는 사진으로는 알 수 없는 사실을 알려주는 동시에, 빨간 복장을 하고 가지런히 손을 모으고 있는 여성들의 사회적 정체성, 즉 직업과 연령을 드러낸다. 작가의 텍스트는 이 '장한평'의 풍속도에서 사진이 보여주지 못하는 사실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일반적으로 사진 제목은 사진 이미지 속에 있는 시각 정보를 언술 언어로 되풀이 하거나, 그 의미를 해설해주는 역할을 한다. 거의 대부분 이미지가 담보하고 있지 않는 정보를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박진영은 사진으로 보여줄 수 없는 정보를 말하기 위해 텍스트를 동원한다. 즉 '일당 12만원씩 버는'이라는 텍스트를 명기하여 사진이 보여줄 수 없는 현실의 내부, 일상의 이면을 보여준다. 이것은 현실의 외관, 일상의 겉모습만을 찍을 수밖에 없는 사진의 한계를 넘어서 현실의 이면을 파헤치려는 작가의 사회학적 욕구에서 비롯된 것이다.
   비근한 일상의 배후를 드러내려는 작가의 의도는 도큐먼트 작업에서는 파격적인 파노라마 포맷의 선택을 부르게 했다. 현실에 대한 정보를 가능한 한 많이 포착하고, 인물과 환경의 관계에 대한 구성요소들을 광범위하게 포착하기 위함이었다. 작가는 다큐멘터리사진, 포토저널리즘이라 불리는 사진적 관행들이 상습적으로 행하는 주관적 선택과 배제의 프레이밍을 거부하기 위해 파노라마 카메라의 폭넓은 시선과 무작위적인 프레이밍을 선택한 것이다. 그리하여 작가의 이데올로기, 이해관계, 취향을 주입시키면서 객관성 혹은 휴머니즘을 표방하는 전통적 다큐멘터리 사진과 포토저널리즘에서 벗어났다. 파노라마 카메라가 그 기다란 시각으로 우발적으로, 비개성적으로 포획하는 하찮은 현실들이 지금, 이곳에 대한 이해와 분석의 정보들로 기능한다고 작가는 판단했던 것이다.
   <도심 속 예비군 훈련, 석관동 2004>는 동원 예비군이 화면의 중심을 차지하지만, 부차적이고 주변적인 공간 정보들이 주제를 압도하는 양상을 띤다. '예비군 훈련'이라는 주제에 기생하는 하천 가장자리에 조성된 자전거 도로, 하천 변에 즐비한 아파트, 교각 도로에 부착된 현수막, 공사 중인 하천은 현대 서울의 도시환경을 증언한다. 그리고 이 공간과 '예비군 훈련'이 충돌하며 만들어내는 시각적 부조화가 한국 사회의 모순과 갈등을 간접적으로 암시하고야 만다. <중랑천의 배달부 - 한달 평균 120만원을 버는 K 모씨, 중량천 2003> 역시 마찬가지다. 아파트가 즐비하고 도시의 교각이 가로지르는 환경 속에서 낚시에 몰두하는 시민들은 무엇보다도 한국의 열악한 여가 양상을 보여준다. 낚시와는 어울리지 않는 이 도시 공간과 '중량천 배달부'가 함께 교차하면서 한국 사회에 내재된 일상의 부조리는 여지없이 고정되고야 만다.
   한국 사회의 일상의 풍경을 파노라마 카메라의 전방위적 시선으로 가감 없이 드러내며, 그 풍경 속에 내재된 한국의 자본구조와 풍속을 무미건조하게 그러나 신랄하게 파헤치는 박진영의 도큐먼트 작업은 그 형식에 있어서나 내용에 있어서, 이른바 다큐멘터리 사진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힘겨운 작업임에 틀림없다.

* 롤랑 바르트의 글은 「카메라 루시다」 (조광희 역), 서울, 열화당, p.34-35에서 인용한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