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춤으로써 드러내는 정직한 기록

최성각(소설가)


어느 날, 사진을 들고 찾아온 젊은이를 만났다. 수줍은 듯 내민 명함에는 사진가 Area Park이라고 쓰여 있었다. 그와 동행한 친구는 내가 '형님'이라 부르던 분의 아드님이었다. 이름은 찬. 찬은 그와 함께 젊은 날 사진공부를 했으며, 그 즈음 같은 방을 썼다고 했다. 찬은 지금은 더 이상 사진을 찍지 않는다고 말했다. 재능 때문이라고 짧게 말했지만, 찬이 여전히 사진을 찍고 있는 친구 앞에서 그런 말을 남의 일처럼 덤덤하게 말할 수 있기까지 걸린 시간을 나는 잠시 추측해본다. 얼마나 힘든 시간이었을까. 사진을 공부하고 찍던 젊은이가 그것을 포기했다고 말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하지만 찬의 목소리는 과장되지 않았고, 그 말을 할 때의 얼굴은 평안했다. 하지만 옆에 있던 그가 찬의 말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아마 그가 하고 싶은 말은 찬의 말이 틀린 말이라는 뜻으로 느껴졌다. 그때 나는 그의 친구에 대한 배려를 보았다. 친구의 소개로 곧 전시할 자신의 작품들을 들고 생전 처음 만나는 한 소설가를 찾아온 일에 대한 쑥스러움, 친구가 포기한 일을 자신은 계속 하고 있는 데 대한 겸연쩍음, 혹은 찬이도 사실은 여전히 사진을 찍고 있어요, 라는 말이 그의 얼굴에 어려 있었다.
   그는 비교적 겸손하고 세심한 성격의 사람으로 느껴졌다.

Area Park의 사진들도 그랬다.
   너무나 조용하다. 동작들은 절제되어 있고, 사건은 감춰져 있다. 사진이 말하려는 것은 낮은 목소리였다. 감동을 강요하지 않았고, 주제를 잘 전달하기 위해 작가가 웅변하지 않았다. 그의 작품이 보는 이에게 요구하고 있는 주문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주의력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만약 당신이 자세히 보려고만 한다면 저도 보지 못했던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거예요",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실제 그랬다.
   하지만, 한국사회처럼 요란한 일이 자주 일어나는 곳에서 그의 작품은 시선을 끌기에는 어딘가 부족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한국사회는 좋게 말해서 역동적이지만, 달리 표현해서 광적으로 에너지가 넘치는 사회다. 모두 들떠 있고, 뜨거운 난로 같은 기운 속에서, 흥분한 얼굴로 살고 있다. 타인에게는 적대적이고, 공공질서보다 자신의 감정에 더 충실하며, 친절의 가치는 자주 외면 당한다. 사건사고도 이 지구촌의 어떤 사회보다 자주 일어나는 곳이다. 다리도 무너져 내리고, 어떤 때에는 멀쩡한 백화점 건물이 주저앉기도 했다. 한국사회는 그런 치욕스러운 경험과 기억에서 아직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오래 기억하기에는 지금 닥친 일들을 해결하고 제대로 해석하기에도 벅차다. 거리는 상업광고물로 덮여 있고, 차들이 질주하는 열기는 지구온난화와 관계없이 뜨겁다. 그보다 뜨거운 것은 충분히 분출하지 못한 듯이 보이는 사람들의 불만 어린 얼굴들이다. 어딘가를 향해 질주하는 데 그 방향과 도착지에 대한 확신이 불투명한 곳이 한국사회다. 그냥 달려야 하기 때문에 달릴 뿐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기도 하다. 누군가 질주의 태엽을 감아놓았는데, 정작 태엽만 감아놓고 그 누군가는 도망을 친 것 같은 사회가 바로 한국사회다. 모두 여기 태어났기 때문에 어떤 소용돌이에 휘말려 든 것 같은 사회, 그곳이 바로 그가 사진가로서 지속적으로 탐구하고 있는 한국사회다.

Area Park은 다큐멘터리 사진가다. 말하자면 증언자다.
   그는 자신이 증언자라는 것을 잠시도 잊은 적이 없다.
   하지만, 그가 증언하는 방식은 다른 증언자와 사뭇 다르다. 그는 한국사회의 어떤 부분적인 특성을 일부러 외면하거나 묵살한 것 같기도 하다. 거기에 그의 작가적 성격이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Area Park은 잘 선별된 주제에 의해 역동적인 한국사회를 증언하되, 매우 비역동적인 방식과 기법으로 한국사회를 묘사하고 증언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그는 독창적이라기보다 인내심이 더 돋보이는 작가다.
   한국사회처럼 역동적인 사회에서 역동적인 주제를 쇼킹한 방식으로 표현하고 싶은 욕구와 거리를 두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는 우리 사회의 특성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다. 그 점에서 그는 사진예술의 특성을 알고 있는 작가라고 생각된다. 그는 존 버거(John Berger)가 말했듯이 이미지(사진)가 문학보다 더 정확하고 풍부하다는 것을 잠시도 잊은 적이 없다. 그러나 그는 흥분하지 않는다. 자신의 작업에서 그는 자신이 미처 보지 못했던 것을 발견하고 배우고, 그 발견을 통해 자신의 인식을 조용히 확대하고 있는 듯하다. 그 점에서 그는 자신의 자연나이보다 더 오래 남을지도 모를 자신의 작품의 미래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그가 흥분하지 않고, 빨리 주목받지 않으려고 하는 인내심의 바탕에는 그런 확신이 깔려 있는지도 모른다. 강한 충격을 통해 주의력을 환기하는 일도 사진의 일이지만, 순간을 영원으로 고착시켜 재해석의 공간으로 남겨두는 지루한 작업도 증언자의 임무라는 것을 그는 자신의 작품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Area Park의 이번 작업은 '도시소년'이다.
   21세기 초반, 한국사회를 살고 있는 청소년들이 바로 이번 작업의 주제다.
   한국의 청소년들, 이들은 누구일까. Area Park은 그들이 '그저 한 소년으로 성장해 나가는 것조차 버거워 보인다'고 말하고 있다. 그들의 가치관과 욕망과 세상의 진행은 그 내용이나 속도에서 정비례하는 행복한 관계로 흐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왜 이런 주제를 택했을까. 아마 작가의 청소년기 또한 지금의 청소년들처럼 힘겨웠던 것은 아닐까. 결국 오늘의 청소년들을 카메라에 담으면서 그는 자신이 보냈던 청소년기를 위로하려는 무의식이 작동하지는 않았을까.
   두 소년이 국립묘지 앞 갈림길에 서 있다. 소년들의 가슴에는 조의를 뜻하는 리본이 달려 있다. 조국을 위해 죽었다고 죽은 자들의 의지와 관계없이 그 죽음의 의미가 단정되었고, 그랬기 때문에 국가의 이름으로 모셔진 영혼들의 집에 이 청소년들은 사실 관심 없다. 더 이상 오늘의 청소년들에게 낡은 국가주의가 설득력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소년들은 여전히 같은 셔츠와 같은 색깔의 바지를 입고 있으며 같은 형태의 모자를 쓰고 있다. 누가 이 소년들을 엄숙하게 국가가 조성한 날, 이곳 신성한 길모퉁이에 세웠을까. 여전히 국가주의가 팽배해 있는 학교제도가 이 소년들을 이곳에 세웠다. 소년들이 서 있는 포즈는 이 무료하고 짜증나는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이때 소년들의 자세가 바로 소년들의 내면이다. 참배객들 누구도 이 소년들에게 무관심하다. 강요하는 국가는 늘 불안하다. 그 불안이 소년들에게 제복을 입히고 국가적 기념일에 안내자 역할을 요구하게 만든다. 엄숙한 자세로 무릎을 꿇고 참배를 하는 초로의 신사와 도열된 묘비들과 함께 소년들의 강요된 길안내 사진은 비로소 완성된다. Area Park의 작품은 자주 대비를 통해 그 주제를 드러내곤 한다.
   소년들은 그래서 제도권 교육의 시간표가 끝나는 즉시, '자신의 옷'으로 갈아입고 거리로 나선다. 제복을 벗은 소년들이 선택한 개인의 옷은 그 고유의 계층을 기호처럼 드러낸다. 어떤 옷을 입었는가는 개성의 표출이라기보다는 어떤 계층인가를 드러내기 십상이다. 자본주의의 극복해야 할 문제점을 고스란히 안고 있는 한국사회에서 학교를 마친 청소년들이 자본의 질서에서 자유롭기란 참으로 힘들다. 인라인 스케이트 강습을 받는 아이들의 빨간 모자는 새로운 의미의 제복이다. 강습을 받지 않는 소년들과 차별되는 표지로서 빨간모자는 작동한다. Area Park의 작품세계는 노골적으로 드러내지는 않지만 깊은 계층의식이 도사리고 있다. 빈부의 양극화 현상이 극심해지고, 그 간격이 메워질 일이 갈수록 어려워지는 한국사회에서 그의 그러한 사회의식과 시선은 정직성 이전의 기본적인 태도가 아닐 수 없다.
   때로 청소년들은 자동차 전시장 앞에서 '몸'의 거짓 신화에 의해 새롭게 주목받게 된 여체들 사이에 서서 감춰진 성적 욕망을 수줍게 표현하기도 한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 있는 소년들의 확고한 관심은 새로 개발된 자동차에 있다기보다는 레이싱걸들에 있는 게 틀림없다.
   때로 소년들은 오토바이로 자신의 주체 못할 젊은 힘을 발산하기도 한다. 헬멧도 쓰지 않고 친구의 오토바이에 함께 탄 소년들은 그들의 세계와 무심하게 진행되는 어른들의 일상 한복판을 질주한다. 질주하는 소년들을 어른들은 단지 소음 이상의 대상으로 주목하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오토바이 주변의 청소년들에게는 폭주의 기쁨이 없다.
   그 외로움은 결국 스포츠에 몰두하게 만든다. 한국사회는 문화의 힘보다 스포츠의 힘을 더 숭배하는 사회다. 태권도는 고독한 스포츠이지만 한국사회의 국기다. 태권도는 그것이 스포츠이면서 동양적 도의 가치가 구현된 무예이기도 해서 도복(道服)은 거리의 복장이 아닐 뿐 아니라 금기시된다. 그렇지만 때로 소년은 도복을 입고 거리 한복판에서 자신을 표현하기도 한다. 소년들은 본래 그 특성상 외로운 존재들이다. 잔디가 잘 깔린 경기장에 진출하기 위해 맨땅에서 연습을 하는 소년들은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싶은 욕구의 발현, 그 자체다.
   거리는 상업광고로 점철되어 있고, 학교는 밀집된 아파트숲 속에 감금된 기형적인 모습으로 간신히 자리잡고 있다. 자연은 도시화된 자연이다. 소년들은 자연과 제대로 된 온전한 관계를 맺기가 어렵다. 자연은 신축공사장의 그림으로 존재하기 일쑤다. 그것은 상업광고가 거짓말인 것처럼 거짓말이다. 소년들은 그 거짓말의 뿌리를 명쾌하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느낌으로는 알고 있다.
   이것이 21세기 벽두, Area Park이 그린 한국사회의 청소년들의 모습이다. 소년들은 이와같은 환경에서 어떤 꿈을 꾸고 있을까. 그는 작업이 깊어질수록 소년들에 대한 이해가 더 오리무중에 빠진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하지만 그는 서둘러 해석하려 들지 않는다. 다만 보여줄 뿐이다. 올바른 해석은 차라리 지금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의 환하고 밝지만 어둡고 음울한 사진들은 '오늘'을 미래의 시선으로 보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게 한다. 그게 바로 Area Park이 겨냥한 지점이고, 그의 인내심이고, 또한 작가적 야망이다. 달리 말하면 '지금 이곳'을 남의 눈으로 해석하지 않겠다는 책임의식, 말이다.
   Area Park은 틀림없이 다큐멘터리 사진가이고, 다큐멘터리 사진가는 시대의 증언자라는 것을 잠시도 잊지 않고 있다. 그렇지만 그는 친절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설명할 수 없는 일에 대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다만 충실한 기록뿐이다" 그는 아마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그의 조용한 작품들은 격동적인 드라마로 점철되어 있지는 않지만, 주의 깊게 살펴보면 숨은 이야기들이 살아 숨쉰다. 숨은 이야기들은 마치 벌판의 풀처럼 조용히 아우성을 친다.
   이야기들을 감춤으로써 드러내는 일, 그것이 바로 Area Park이 자신의 파노라마 사진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는 방식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