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이 소년을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이유, 그리고 그들이 같이 구원 받는 길
이영준
소년들에게는 집이 없어 보인다. 북한에서 압록강을 건너 바로 귀순했는지, 사진 속의 두 소년은 삐쩍 말랐고 정처 없어 보이며 어떤 곳에도 속할 만한 자신이 없어 보인다. 그들은 그냥 강물이 흐르는 강변 억새풀 속에 몸을 누이며 쉴 수 있는 공간을 찾을 것만 같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 집인지 입을 옷인지 돈인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그들은 소년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의 강변은 한강처럼 콘크리트로 뒤덮여 있지 않고, 억새와 누런 풀이 가득하며, 물 속의 퇴적물이 보일 정도로 물도 맑다. 소년들의 강인 것이다.
반면, 사장님은 사장님의 강물 속에 빠져 죽었다. 그는 콘크리트로 뒤덮여 있고, 자살한 장소를 찾기 좋게 큰 다리 옆에, 방송국 취재팀 까지 올 수 있도록 차를 대기 좋은 곳에서 죽었다. 그는 의전이 갖춰진 어른의 강에서 죽었다. 물에서 건진 그가 입고 있던 바지에는 줄이 빳빳이 서 있을 것 같다. 소년과 어른이 이렇게 다를 수가 있다니. 이 소년들은 누구나 성장기에 한때 겪었던 그 소년들이 아니라, 외계에서 뚝 떨어진 소년으로 보인다. 사실 솔직히 말하면 소년으로 보이는 게 아니라 ‘소년’이라는 별종의 인간들로 보인다. 자기들 만의 어휘를 가지고 있고, 자기들 만의 행동양식을 가지고 있으며, 자기들 만의 사물을 가지고 있다.
물론 어른들은 이 들을 절대로 이해 못한다. 어른들이 이해 못 하는 곳으로 도망가는 것이 이들 소년들의 직업이기 때문이다. 직업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들의 도주욕망이 어른들이 한때 가지고 있다가 별 볼 일 없으면 때려치고 마는 그런 직장 보다 훨씬 질기게 그들의 목숨에 붙어 있기 때문이다. 어떤 애들은 쇼바를 올린 오토바이를 타고 밤거리를 휘젓고, 어떤 애들은 간판이 요란한 먹자골목에서 침을 찍찍 뱉으며 삐끼 노릇을 한다. 그들의 생김새나 옷차림, 몸가짐이 어른들은 통 마음에 들지 않는다. 당연하다. 어른들 마음에 드는 순간 그들은 소년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소년들을 어떻게 어른이 사진 찍는가. 불가능하다. 따라서 이 소년들에 대한 사진은 다큐멘타리가 아니다.
사진으로 찍힌 것은 소년들의 삶의 태도와 어른들의 삶의 태도 사이의 간극이다. 이 간극은 요즘 인터넷에 소년들이 직접 찍어서 올린 사진들에 나타난 그들의 몸가짐과 태도를 보면 금방 확인할 수 있다. 이런 간극을 뛰어 넘어, 진실된 어른이 소년들을 진실되게 찍는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다. 사실은 불가능의 범주가 아니라 불성립의 범주라고 해야 할 것이다. 어른들의 카메라에 소년들은 들어오지 않기 때문이다. 카메라에 들어온 것은 소년들이 잠깐 어른을 위해 포즈를 취해준 그 순간이다. 어른은 소년을 사냥한다고 믿고 있지만, 소년들은 잠깐 포획된 듯한 표정을 짓고는 자신들의 정글 속으로 몸을 숨긴다. 소년들의 생태를 더 잘 조사하여, 정글로 따라 들어가면 더 진실된 소년들의 모습을 잡을 수 있을까? 아마 가능할 것이다. 그들이 어떤 동네에 잘 출몰하고, 몇시에 출몰하고, 어느 술집에 가서 무슨 표 뽄드를 마시는지, 아니면 엑스타시를 사 먹는지 포착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게 소년인가? 소년이기는 하지만, 소년들에게는 훨씬 미묘한 결이 숨겨져 있는 것 같다. 우리가 소년일 때는 그게 딜레마였다. 왜 어른들은 우리를 인정하지 않을까? 그게 꼭 불량소년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아마 감수성이 예민한 소년이라면 누구나 중고등학교 때 자살충동이나 가출충동을 느껴봤을 것이다. 아직 쓸모 있는 인간이 아닌 소년이 길거리 말고 어디를 가겠는가? 가정도 능력과 경쟁의 장인데. 어른들이 소년을 인정하지 않는 이유는 소년이 아직 쓸모 있는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소년이 아무리 새벽에 일어나 신문배달을 잘 한다고 그를 칭찬해주는 어른들은 없다. 차라리 쇼바를 올리고 폭음을 내며 길거리를 휘젓는 것이 더 일찍이 인정받는 방법이다. 그러나 그 인정은 우호적인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죽고 죽이는 가혹한 인정투쟁의 결과로 일어나는 것이다. 결국 인정은 죽음을 의미한다. 이순신 장군도 죽었기 때문에 인정 받았지 않은가.
그래서인지 소년의 얼굴에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 있어 보인다. 실제로 많은 소년들이 죽고 있다. “성적 때문에 죽었대”나 “왕따에 시달리다 죽었대”는 그들을 인정하는 언표는 아니다. 그것은 신문기사를 읽은 것이지, 소년을 인간주체로서 인정해주는 것은 아니다. 소년은 보장받기를 원한다. 어른들 만큼의 명예나 지위나 돈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어린 것이 뭘 아느냔 식의 경멸은 안 받았으면 한다. 그런데 그런 인정을 가로 막고 있는 것은 어른들의 편견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카메라다. 진실의 기계로서의 카메라는 많은 편견을 숨기고 있지만 그런 사실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고약한 기계다. 그러나 사람들은 카메라가 무엇을 보여주고 무엇을 안 보여주는지 모른다. 그들에게 카메라는 모든 것을 보여주는 백설공주 동화 속의 거울이다. 그러나 카메라는 차라리 플라톤의 동굴에 가깝다. 그것은 아무리 디지털이 발달하고 광학이 발달한 오늘날의 카메라라도 마찬가지이다. 이 세상에 17밀리와 300밀리의 초점거리를 동시에 찍을 수 있는 카메라는 없으며,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찍을 수 있는 카메라도 없다. 카메라가 강력한 진실의 기계로 기능할 수 있는 이유는 그런 한계를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라도 자신의 개인적인 단점을 다 드러내놓으면 장관이나 대통령을 할 수 없을 것이다. 발기부전의 장관, 강아지를 무서워 하는 총리, 치질 걸린 대통령은 어울리지 않는다. 그런 병명들이 훌륭한 인간으로서의 그들의 쓸모에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별반 쓸모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소년들에게는 그런 단점들이 잘 어울린다. 침 찍찍 뱉는 소년들, 운동화 찌그려 신은 소년들, 짝다리 집고 바지가 구겨진 소년들 다 잘 어울린다. 카메라가 그들을 찍을 때 어떻게 될까. 당연히 그들은 이중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가뜩이나 추래한데, 깔쌈하게 인정받기란 글른 것이다. 그러나 인정받지 못한다고 해서 아직 사람이 아니라고 한다면, 누구나 자신의 어릴 적 과거에 한 때 있었던 소년이라는 시기를 홀랑 삭제해 버리는 것 같이 무서운 일이다. 좀 위선적으로 들릴지 몰라도, 소년이란 아직 인정을 받지 못했지만 언젠가는 인정을 받기 위해 준비하는 과정에 있는 인간들이다. 실업자를 취업준비생으로 부르는 것 같이 낯간지럽게 들리는 이런 표현은, 그러나 어른들이 얼마나 위선적으로 소년들을 대하는지 솔직하게 표현해서 좋다.
소년들이 어른이 되면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가? 사진의 시퀀스로 볼 때 어른이 되면 짜장면을 나르던가 공사판 인부가 되던가 경마장에서 눈이 뻘개서 마권을 뒤지고 있던가 회사 사장이 됐다가 강물에 뛰어들어 자살하던가 사창가에서 몸매 자랑하고 있던가 하는 일 밖에 없다. 어른이 돼도 별 볼일 없는 것이다.
훌륭한 일을 하는 어른들은 다 어디 간 것일까? 인정 속에 있다. 인정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사회의 초자아 속에, 지도이념 속에, 언론보도 속에. 윤리 속에, “착하게 살자”는 메시지 속에 들어 있다. 어른들은 다 죽은 것이다. 그들이 입고 있는 줄 선 양복, 그들이 타고 다니는 고급 승용차, 그들의 지위, 그들의 점잖은 공식적인 말투, 그들이 먹는 훌륭한 음식은 죽은 시체의 텅 빈 내부에 솜을 채우듯이 채워 넣은 충전재일 뿐이다. 그것보다는 비록 폭주족이거나 뽀다구 안 나는 옷을 입었거나 아직 거칠은 말투 덕분에 소년들은 살아 있는 것이 아닐까? 비록 그들이 추래한 옷 입고 서 있는 길거리가 그들의 것이 아니고, 아무리 쇼바 올린 오토바이를 타고 누비고 다녀도 길거리는 결코 그들의 것이 되지 못할 테지만, 침을 찍찍 뱉을 자유를 가지고 있는 그들이야말로 길거리의 주인공이 아닐까? 광화문 네거리에 똑바로 줄을 맞춰 앉아서 대기하고 있는 전경들이나, 똑같이 줄을 맞춰 서서 농성중인 농민들이나, 자살한 사장이나 길거리의 주인은 아니다.
그들은 길거리를 너무 정치적으로 대하기 때문이다. 정말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었으면 왜 만인이 보는 공공장소인 강물에 뛰어들었겠는가? 아무도 안 보는 집구석에서 조용히 사라지지. 그의 자살은 너무 정치적이고 시각적이다. 그는 죽으면서까지 인정받고 싶었던 것이다.
폭주족의 질주는 탈정치적이다. 그들은 어른들이 정해 놓은 길거리의 정치학이 싫었다. 어른들은 그 질주 마저 ‘청소년 문제’라는 식으로 정치적으로 해석하지만, 그것은 정치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행위다. 그것이 얼마나 정치와 상관 없는지 알려면, 소년/어른의 구분이 사실 무지하게 정치적인 것이라는 점만 알면 된다. 소년이 됨으로써 그들은 마음대로 섹스도 결혼도 음주도 흡연도 할 수 없다. 소년과 어른을 구분하는 행정과 담론의 체계는 신체와 취향 마저 규제해버리는 엄청난 권력이다. 어른들은 소년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그들을 꽁꽁 묶어 버린다. 소년은 타자화의 핑계일 뿐이다. 그렇다고 소년들이 당당하게 “우리도 인간 주체로 인정해 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되면 또 다른 얄팍하게 감동적인 드라마를 만들고 말게 될 것이다. 소년들은 밥맛 없는 어른의 세계를 슬금슬금 피할 뿐이다. 마치 개미들이 인간의 눈을 피해 땅 속에 방대한 구축물의 조직을 만들어 놓듯이, 소년들은 어른들의 시선의 아래 지층에 자신만의 거대한 지층을 만들어 놓는다. 거기에 어른들의 어휘로 된 생태학을 부여한다면 소년들은 죽고 말 것이다. 관찰하는 순간 개미집이 사라지듯이 말이다.
소년들이 길거리에 내팽개쳐져 있는 듯이 사진 찍히고, 어른들도 길거리의 주인공이 아닌 내팽개쳐진 존재로 사진 찍는 것은 둘 사이의 간극을 없애는 아주 좋은 방법이다. 양 쪽 다 나락으로 떨어트려, 존재의 헛된 긍정성을 보장해주는 가짜 장치들, 즉 체면, 지위, 소유 등을 벗겨 버리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들이 다 극도로 한심한 상태에서 영화가 끝나고 마는 파스빈더의 <폭스와 그의 친구들>을 보는 듯하다. 카자 실버만은 주체의 공허에 대한 라캉의 논의를 빌려, 그의 영화가 인간 존재의 공허를 허위로 메꾸어 주고 있는 모든 가설적 장치들을 없애 버린 작품이라고 평가했는데, 사실 이런 식의 극단적인 부정성은 도달하기 힘들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구원에 대한 갈망이 약간이라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이 죽어버린 이 세상에서 구원은 긍정성을 통해서가 아니라 부정성을 통해서 온다. 서로 멱살 잡고 벼랑 아래로 떨어지는 전략을 통해서 오는 것이다. 밑바닥이 훤히 보일 정도로 아주 솔직하고 깨끗한 자살전략을 통하여 소년과 어른들은 구원받는다. ‘이웃을 사랑하자’는 식의 헛된 자선이나 희망을 품은 병신 같은 메시지를 버린 곳에 박진영의 구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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