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풍경 다시 보기

박평종


   1.
지난 수년간 한국 특유의 사회, 문화적 현상을 날카로운 시각으로 포착해 온 사진가 박진영(Area.Park)이 분단풍경을 주제로 한 사진을 선보인다. 미군의 폭격장으로 널리 알려진 매향리와 최근 미군기지 이전 장소로 문제가 되고 있는 평택 대추리, 미군기지가 운집해 있던 동두천 일대 등을 부지런히 돌아다니며 촬영한 이 사진들은 분단 상황에서 비롯된 독특한 한국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사실 분단풍경은 이전부터 많은 사진가들이 줄기차게 다루어 왔던 주제이다. 오랫동안 분단 문제에 천착해 왔던 사진가들도 있고, 시사적인 차원에서 특정 문제를 부각시키려 했던 시대의식에 민감한 사진가들도 있었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박진영의 분단풍경은 그리 새로울 것 없는 진부한 모습을 보여준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분단의 모습이 진부할 까닭이 없다. 똑같은 모습도 보는 이의 마음에 따라, 혹은 그 모습이 속해 있는 시대의 정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물며 한국 현대사의 질곡을 집약적으로 함축하고 있는 분단 상황이란 한시도 눈을 떼지 않고 계속 주시해야 할 모습이기조차 하다.
   분단은 종료되어버린 사태가 아니라 여전히 진행형으로 남아 계속 변화하는 사태이다. 분단을 둘러싼 국제정세나 국내 정치 상황만 변하는 것이 아니라 분단이 야기한 한국의 사회, 문화적 지형도 변하고 분단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도 변한다. 이 모든 것이 변하는데 분단의 모습이 십년, 이십년 전의 모습 그대로라고 생각한다면 나태한 것이다. 하지만 정작 분단 상황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태도는 본질적으로 보자면 예전과 크게 다를 것이 없다. 우선 사람들은 반세기 이상 지속되어 온 분단 상황에 익숙해져 있다. 익숙함은 익숙해진 대상에 대한 차분한 사유를 불러오는 법이지만 한편으로는 지겨움을 낳기도 한다. 한시라도 빨리 떨쳐내 버리고 싶은 지겨움이 아니라 변화를 바라는데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는 것에 대한 짜증 때문에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은 지겨움이다. 이는 분단 상황을 관통하여 살아온 세대뿐만 아니라 분단을 말로만 듣고 살아 온 세대에게도 마찬가지이다. 분단 상황에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는 생각은 한반도에 살고 있는 이들에게는 일종의 정언명령과도 같지만 그것을 실현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모두가 동상이몽이다. 분단의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도 다르고, 분단을 극복하는 방법과 시기에 대해서도 생각하는 바가 다르다. 분단 상황이 지속되는 까닭이 본질적으로는 국내외 현실 정치논리와 얽혀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것을 풀어내는 것은 정치와 외교의 몫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정치 논리에 거름이 되어야 할 대중들의 의식 속에서 분단 상황이 점차 망각되어가는 현상은 분단을 모른 채 하여 결국 고착화시킨다는 점에서 매우 경계해야 할 일이다.
   작가는 담대하게도 작가노트에서 변화한 시대의 분단 상황에 개입하려 한다고 적고 있다. 하지만 힘없는 한 개인이 분단 상황이라는 거대한 역사의 수렁에 개입한다고 해서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어쩌면 그는 발걸음조차 뗄 수 없어 자신의 무력함을 자조하거나 사회의 무관심을 빈정대는 데에서 멈출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개입에 대한 그의 의지에는 치기와 오만이 섞여있다. 냉철한 학자들은 분단 문제가 대중들의 머리 속에서 잊혀져가는 동안에도 끊임없이 국제정세와 주변 국가들의 역학관계를 분석하고 남북한 양국의 정치 현실을 파악해가면서 분단을 극복하는 가장 합리적인 방법을 연구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와중에서 분단 문제는 냉엄한 현실 논리의 뒷전으로 밀려나고 있다. 이제 분단 극복은 정언명령이 아니라 '뜨거운 감자'가 되어가고 있다. 어쩌면 분단 문제에 대한 논의는 권태로워서가 아니라 현실 논리 때문에 얼마 지나지 않아 기피대상이 될지도 모른다. 지금은 당위의 여운 때문에 분단 극복을 말하지만 냉엄한 현실 앞에서는 제 동포의 비극을 못 본채 할 수도 있다. 우리는 이미 반세기 전에 내가 살기 위해 형제를 죽여야 하는 극한의 상황을 겪었다. 절박한 현실 앞에서는 당위보다 본능이 앞선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반도 이남의 사람들에게 분단 극복은 점차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운 과제가 되어가고 있다. 분단은 현실이지만 분단 극복은 추상으로 변하는 것이다. 분단 극복이라는 당위는 아직은 관성처럼 남아있지만 관성이란 오래가지 않아 사라지는 법이다. 작가의 오만은 그런 점에서 분단 문제가 식지 않는 시대의 화두로서의 열기를 간직해 주기를 바라는 염원에서 나온 것이라 해야 할 것이다.

   2.
작가가 분단 상황을 바라보는 시각은 다분히 이념적이다. 이는 그가 분단의 상징을 찾아다니는 태도에서 엿볼 수 있다. 매향리와 대추리 동두천 일대 등 그의 발길이 닿는 곳은 대개 냉전 이데올로기와 미 제국주의의 유산이 묻힌 곳이다. 사실 분단의 상처와 아픔을 직접 체험한 전전 세대에게 이데올로기란 한낱 뜬구름 잡는 얘기에 불과하다. 눈앞에서 동족이 죽어가고 가족, 친지와 생이별을 해야 했던 이들에게 민주주의니 공산주의니 하는 말들이 무슨 의미가 있었겠는가. 이념이 인간을 이롭게 하지 못한다면, 또는 정의를 바로 세우지 못한다면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것이다. 이념을 도구가 아니라 목적으로 여겼던 이들에게 분단은 화해할 수 없는 두 개의 이념이 공존할 수 있는 마지막 해결책이었다.
   분단 문제를 이데올로기의 거울에 비추어서 생각했던 세대에게 분단이 냉전 이데올로기의 산물로 인식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그것이 맞다. 하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냉전 논리가 조금씩 와해되어 가는 80년대 후반 이후부터 분단 문제를 예의주시하던 이들은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냉전 시대가 끝나면 자연스럽게 분단 상황도 끝나야 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논리인데 분단 상황은 더욱 악화되어 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냉전 시대는 끝이 난 것이 아니라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거나, 분단 상황 자체에 큰 변화가 생겼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를 연구하는 것은 학자들의 몫이다. 하지만 단지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고 해서 그토록 절박하게 맞서왔던 문제를 내팽개쳐버릴 수는 없는 일이다. 작가는 그래서 변화한 시대의 분단풍경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심정으로 관찰하기 시작한다. 진부했던 모습도 시대가 변했다고 생각하니 생경하게 다가오고 예전에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분단의 양상들이 시야의 그물에 걸려든다.
   분단의 상징은 도처에 널려있어서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만큼 분단이라는 씨앗이 풀씨처럼 흩어져 여기저기 싹을 틔우기에 충분한 세월이 흘렀다는 뜻이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찾아든 이념의 권태기를 보낸 이후 다시 청명한 시야를 회복하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작가는 다시 이념에 기댄다. 감수성 예민하고 시대정신에 치열했던 대학 시절부터 작가는 분단문제를 이데올로기의 그늘 아래에서 배웠기 때문에 그 편이 쉬운 것이다. 이데올로기가 신념이던 시절도 있었지만 이제 그것은 책 속에 잠든 노쇠한 철학자의 넋두리처럼 되어버렸다. 그렇다고들 말한다. 현실 타개의 지렛대가 되어주지 못하는 이념을 어디에 쓸 것인가. 그래서 학자들은 새롭게 이데올로기를 다시 연구하고 근원에서부터 문제를 되짚어가지만 무기력한 머리보다 부지런한 발이 더 소중한 사진가에게는 녹슨 이데올로기라도 여전히 에너지가 된다. 움직일 수 있는 추동력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작가는 분주한 발걸음으로 분단의 상징 찾기에 나선다.

   3.
국토가 두 동강난 것만으로도 한스러운 마당에 전쟁을 억제한답시고 우리 영토 곳곳에 들어와 주인 행세를 하고 있는 미군의 모습은 눈에 거슬리다 못해 불경스럽기까지 하다. 전쟁 억제란 그럴듯한 명분이지만 냉엄하게 보자면 그것은 분단 유지의 논리이자 나아가 냉전논리의 유산이다. 우리 영토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주권을 주장할 수 없는 해괴한 장소들, 얼마나 넓은 땅이 전쟁이라는 가상 논리에 침식당해 저들의 손아귀에 들어가 있는지 모른다. 게다가 더욱 분한 것은 땅의 주권만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 땅의 주인들이 그 곳에서 벌어지는 가상 전쟁의 희생양이 된다는 것이다. 하소연할 곳도 없고 하소연해보았자 공허한 메아리만 되돌아오는 터라 그들은 마치 주권 없는 국가에 사는 이들과도 같은 설움을 안고 산다.
   미군의 사격장 및 폭격장으로 오래도록 사용되어 왔던 매향리는 이러한 모순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지역이다. 이미 1999년에 매향리는 사진가 강용석의 눈을 통해 세간의 주목을 받은 바 있다. 우리 영토에 속하지만 우리 땅이라 할 수 없는 이 중간지대를 그는 연조의 회색 톤을 이용하여 분단 시대의 상징으로 제시했다. 그로부터 많은 세월이 흘러 폭격장은 폐쇄되었지만 상처는 여전히 치유되지 않은 채 남아있고 비극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이 지역 주민의 생명줄 노릇을 하던 바다와 갯벌은 가상의 전장으로 둔갑한 후 폐허가 된 지 오래이다. 초록으로 덮여 있어야 할 바닷가 주변의 야산은 제 몸뚱이조차 가누기 힘들 만큼 황폐해졌고, 여기 저기 굴러다니는 녹슨 탄피와 표적이었던 것으로 보이는 차량과 가상의 초소는 흉측스런 몰골로 쓰러질 듯 서있다. 이곳이 진정 사람이 사는 곳인가 싶을 만큼 땅은 흉해 보인다. 하지만 폭격으로 떨어져 나간 바위 파편과 녹슨 고철더미가 흩어져 있어도 그 위로 펼쳐진 쪽빛 하늘만은 여전히 눈부시게 곱다. 그토록 오래 수난을 당했지만 섬 맞은편으로 펼쳐진 광활한 갯벌은 여전히 귀한 땅이다. 바다를 덮어 지평선을 드리울 만큼 드넓은 갯벌은 가상 전쟁의 제물이 되었던 이들에게는 아직도 생명의 보고이다.
   폭격장이 폐쇄되었다고는 하지만 분단이 지속되는 한 또 다른 매향리는 언제라도 생겨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우리 모두가 분단의 잠재적 희생양이다.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얽혀 들어가는 희생의 배후논리에는 분단 상황은 곧 준(準) 전시상황이라는 인식이 깔려있다. 전쟁을 목전에 두고 있다면 사람들이 이토록 태연자약하게 살아가는 것은 태만 때문인지 무지 때문인지 아니면 둔한 탓인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다른 한편으로 전쟁을 피하기 위해 국토를 양분시켜놓고도 사람을 상하게 하는 가상의 전쟁을 펼치는 것은 자가당착이다. 한반도에서의 전쟁 가능성에 대해 명쾌한 답을 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만 전쟁에 대한 대비는 전쟁 억제책이 될 수는 있을지언정 분단 상황에 종지부를 찍는 궁극의 방법이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진정으로 전쟁을 피하려 한다면 힘의 논리에 기댈 것이 아니라 분단을 끝장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유장한 호흡을 갖고 느긋하게 기다려야 한다. 포용할 것은 포용하고 다독일 것은 다독여야 하며 줄 것은 줄 수 있어야 한다. 상처를 치유하고 희생을 피하려는 자세 또한 소중하다. 하지만 전쟁 억제력의 중추적 역할이 주변국에 넘어가 있는 이상 내 땅의 일부를 내어줄 수밖에 없다. 장소만 바뀔 뿐 본질은 그대로인 것이다. 평택 대추리가 그렇다. 용산 미군기지는 시대 변화의 힘에 떠밀려 수도의 바깥으로 나가지만 새로운 보금자리를 원한다. 미군이 아예 철수한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은 이상 그들에게 터를 내어주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보상에 솔깃하여 덥석 받아들인 주민들도 많겠지만 그들의 뜻이 전부는 아니다. 약자의 소리는 잘 들리지 않는 까닭에, 혹은 잘 들으려 하지 않는 까닭에 그들의 뜻은 늘 묻혀버리고 말지만 합의로 풀어나가야 할 문제에 힘의 논리를 끌어들이는 것은 현명치 못하다. 뜻이 충돌할 때 합의를 이끌어내기는 어렵다. 당연히 희생도 따른다. 하지만 어째서 늘 착한 약자만이 제물이 되는가. 강자가 자청하여 제물이 되겠다고 나서는 모습을 볼 수는 없는 것인가.

   4.
한편에서는 분단이 야기한 희생의 구조가 쉴 새 없이 꿈틀거리는데도 불구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그것이 마치 먼 나라 이방의 모습처럼 비쳐지기도 한다. 그만큼 분단의 현실에 무디어진 것이다. 분단의 상징들은 점차 둔해져가는 역사의식에 각성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관조 대상으로서의 풍경처럼 변해간다. 분단의 모습은 이 시대 풍경의 일부인 것이다. 통일전망대는 갈 수 없는 또 다른 조국을 먼발치에서라도 볼 수 있게 해주는 애잔함의 상징이지만 사람들은 수려한 경치를 배경으로 사진 찍기에 바쁘다. 분단의 비애는 실종되고 껍데기만 남아있는 것이 분단 상징물의 현재 모습인 셈이다. 전쟁기념관에 설치된 조형물은 전쟁을 이겨낸 전사들의 모습을 영웅처럼 부각시키고 있다. 하지만 형제들 간의 살육에 승자가 어디 있으며 영웅이 어디 있겠는가. 이 전쟁의 본질을 덮어버리는 이념의 차이란 잔혹하리만큼 차갑다. 이념의 책략에 걸려 든 반도의 사람들, 내 생각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다른 이념을 가진 사람들을 모조리 적으로 간주하며 살아간다. 서바이벌 게임장에서 총탄세례를 받는 가상의 적은 이념이 다른 반도 북쪽의 동포들이다. 그토록 정 많고 어질던 사람들이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는지 알 수 없다. 적이란 같이 살 수 없는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동포를 적으로 여기는 한 분단 극복이란 요원한 일이다. 말 따로, 생각 따로, 가슴 따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일관성을 기대하기란 어렵다. 이념의 덫에 걸려 제 것만을 보는데 다른 것이 보일 까닭이 없다.
   어느 폐교 한 구석에 서있는 소년의 동상, 반공 이데올로기의 상징이다. 공산주의가 무언지, 이데올로기가 무언지도 모르는 어린 소년이 초개와 같이 절개를 지키다 죽어갔다는, 분단시대의 또 다른 영웅이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반공 교육의 흡입력이 약해져 가는 시대에 영웅을 감싸고 있던 신비감은 걷혀나가고 초라한 외관만 남아있다. 무너진 집터에 잡풀만 솟아나고 동상은 칠이 벗겨져 나가지만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다. 반공 이데올로기의 상징은 이제 더 이상 상징으로서의 힘을 갖지 못하는 시대가 되었지만 그 이데올로기의 수호자들은 여전히 남아있다. 옳고 그름을 떠나 신념에는 맹목이 따라다니는 까닭에 좌이든 우이든 이데올로기가 신념인 이들은 자기 생각대로만 세상을 본다. 그래서 욕을 먹어도 당당하고 단상에서 밀가루 세례를 받아도 꿋꿋하다. 숨어서만 목소리를 내던 좌파 이데올로기가 밝은 세상으로 나온 이후 우파 이데올로기가 위축되어 간다고 느끼는지 보수단체들은 목청 높여 외쳐대지만 응집력은 예전 같지 않다. 그들 신념의 대리 수호자인 미군도 조금씩 철수하는 세상인 것이다.
   파주 근교에 운집해 있던 미군기지가 썰물처럼 빠져나간 후 이 일대는 급격한 변화를 맞는다. 미군기지와 더불어 형성되었던 기지촌은 유래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흥성하여 용주골은 집단 윤락지역의 대명사처럼 인식되기도 했었다. 거기에서 비롯된 갖가지 사회문제는 차치하고라도 남의 땅에 들어와 큰소리치는 무뢰배에 기대야만 살 수 있었던 이들의 운명이란 기구하기 짝이 없다. 게다가 그들은 양공주라는 이름으로 동족에게조차 버림받지 않았던가 말이다. 미군기지가 있을 때는 모르는 척 하던 정부가 기지 이전과 함께 윤락행위 단속을 펼쳐 그들의 생존권마저 위협하는 현실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어떠한 그럴 듯한 명분도 힘에 기생하여 그들을 내쫓는 나약한 한국정부의 비겁함을 변론하지 못한다. 그들은 법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생존을 위해 떠난다. 빈 집에 남아있는 흔적들은 생존을 위한 처량한 유랑생활의 징표이다. 제 국민을 지켜내는 일보다 힘 센 우방의 눈치를 살피는 데 더 신경을 쓰는 권력자들에게 신뢰를 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한편 군사적으로 힘의 우위를 점하기 위해 천문학적인 액수의 자본을 투자하는 방위산업이 현 시점에서 그렇게 시급한 일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모든 방위산업이 다 그렇지는 않겠지만 은밀한 로비와 뒷돈이 오고가는 이 거래 속에 겨레의 안위를 걱정하는 마음이 있을 리 없다. 분단 극복은 힘의 논리로 이룰 것이 아니라 경제 논리로 풀어야 한다는 인식은 광범위하게 퍼져 있으나 정작 제 돈 내놓는 데에는 인색한 것이 사람 심리이다. 하지만 최소한의 경제적 균형을 맞추어 나가는 것이 분단 극복의 조건이라면 최첨단 병기 구입이 분단 극복의 지름길인지는 의심해볼 일이다. 냉전논리에 기생하던 미군수산업자들은 냉전 구도가 와해되는 것을 원치도 않을뿐더러 새로운 시장 개척을 위해 혈안이 되어 있다. 심지어는 적으로 규정한 집단과도 뒷거래를 하는 것이 그들의 자본논리이다. 최첨단 F-15전투기가 벌이는 에어쇼는 장관이어서 사람들의 환호를 부르지만 현란함의 배후에는 항상 감추고 싶은 무언가가 있는 법이다. 차세대 병기가 화려해지고 사람들의 감탄사가 높아갈수록 분단 망각의 그늘은 짙어만 간다.

   5.
작가가 제시하는 분단 풍경은 그 동안 우리가 익히 보아왔던 모습이다. 시기와 장소는 달라도 반세기 이상 지속되어 온 그 모습이 갑작스레 변할 까닭이 없다. 다만 달라진 것이 있다면 분단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이다. 태도가 달라진 이유는 사람들이 변해서가 아니라 시대가 변화하기 때문이다. 안타까운 것은 시대의 정황이 분단 극복을 재촉하는 방향으로 변하는 것이 아니라 분단을 고착화하는 방향으로 변하고 있다는 것이다. 분단 문제에 냉담해져가는 사람들이나 분단 극복 논의에 권태를 느끼는 사람들은 분단 극복을 원치 않는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분단 극복은 수동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으며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기울인다 하더라도 쉽지 않기 때문이다. 분단 극복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방법은 끊임없이 관심을 갖는 것이다. 무관심이야말로 분단 고착의 지름길이다.
   그런 점에서 젊은 사진가 박진영의 눈을 빌어 다시 보는 분단의 모습은 나태해져가는 우리의 분단 문제에 대한 인식을 망각과 무관심의 우물로부터 건져 올리려는 힘겨운 노력의 소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