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에 관한 몇 가지 사소한 추측 혹은 단정
- 나는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다고 착각했다
김혜선, 작가
형의 편지를 받은 후로 며칠이 그저 흘러갔습니다. 30도를 웃도는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이 여름의 중심에서 지난 토요일 밤에 내렸던 비는 참으로 반가웠습니다. 먼 하늘에서 천둥과 번개가 번갈아 허공을 갈랐고 그때마다 저는 소스라치게 놀라 겁먹은 아이처럼 방 한구석 쿠션에 머리를 박았더랬지요. 언제쯤이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이나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은 무연함, 초연함을 온전히 내 것으로 할 수 있을까요?
그 날, 그러니까 지난 토요일 낮, 형에게 내내 미뤄두었던 답장을 하기로 마음먹었던 그 시각에 저는 용인 인근의 한 식물원에 있었습니다. 계획에 없던 일정이었습니다. 나리와 원추리, 수련, 섬초롱 같은 여름꽃이 어찌나 은근하면서도 화려하던지 찰나 멍해지기도 했을 거예요. 함께 동행한 이는 출간 예정인 식물도감에 들어갈 이미지들을 카메라에 담느라 바빴고 전 하릴없이 주변을 서성거리던 참이었습니다. 더위와 향기에 나른해져 허방을 짚는 듯 휘청거리던 제 발길이 멈춘 것은 한 통의 전화 때문이었지요. 마침, 항아리모양으로 배를 내민 바오밥나무 앞이었어요. 어린왕자가 소유한 소혹성의 영원한 불청객인 그 바오밥나무 말입니다.
사진가인 P의 전화였지요. 이상하게도 말이에요, 지척인 듯, 귓속으로 감겨드는 P의 음성이 그렇게 비현실적일 수가 없었답니다. 해서 잠깐 더듬기까지 했는걸요. 그러나 인공으로 조성해놓은 식물원, 세계 각국에서 채집해와 기어이 관상용으로 가꿔놓은 그 식물들 속이야말로 비현실적 공간임을 뒤늦게 깨닫고 풀썩 웃음이 나더군요.
P의 용건은 도록에 들어갈 '소프트'한 글이 필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고백하건대, 저는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 청을 고사하기 위한 핑곗거리를 찾고 있었습니다. 어떤 형태의 글이 되었건 이즈음 그닥 새로울 것도 없는 고민에 직면해 있는 저로서는 소극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형도 이미 짐작하고 있겠지만 그 고민의 핵심은 물론 무엇을 어떻게 왜, 써야 하는가입니다. 수년 전에 상륙한 포스트모던은 난해의 가면을 쓰고 재기와 가벼움이라는 이름의 깃발을 곳곳에 꽂았습니다. 이제 사람들은 그들 삶에 도사린 어둠, 그늘, 불합리, 모순 따위보다는 표피적이고 찰나적인 농담을 좇습니다. 어쩌면 루카치가 말한 현실반영의 또다른 모습일런지도 모르지요. 시시각각, 그저 '빠르다'는 표현으로는 모자랄 만큼 숨가쁜 이 현대사회의 변화무쌍함을 그에 발맞춰 '포스트모던'하게(?) 담아내는 것이야말로 모든 예술 장르가 추구하는 일종의 소명 같은 것이 되어버린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아날로그에 가까운 제 감각의 촉수는 수시로 벽에 부딪힐 수밖에 없는 운명이 되어버린 거지요.
어쨌든, 용인 인근의 그 무더운 여름 한낮의 식물원에서 저는 어쩔 수 없이 P를 떠올려야 했습니다. 사방으로 뻗은 길 한가운데, 표지판도 없는 방사형 갈림길에 서 있는 것처럼 허랑해져 있던 의식에 비로소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생각거리가 생긴 거지요. 부지불식간에 허방을 짚던 제 의식으로 침투해 들어온 P 덕분에 이렇게 형에게 뒤늦은 답장을 띄우게 된 것이니 그에 관해 조금은 언급을 해야될 듯 싶습니다. 그에 앞서 전제해야 할 것은 형도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저는 사물이든 사람이든, 그(것)들과 가까워지는 방식으로 편견 혹은 편애 외에 다른 길을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극단적 치우침의 위험성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중용과 균등은 제겐 늘상 너무 어려운 주문인걸요. 그저 아직 덜 여문 인간의 설익은 삶의 한 방식쯤으로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P에 대한 이야기도 그의 사진에 대한 이야기도…
P는 다큐멘터리 사진가입니다. 사진과 떨어뜨려진 그는 그다지 진지한 사람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물론 <진지해보이지 않는다>는 그에 대한 이 평가는 다큐멘터리 사진가라는 직업에 대한 선입견에서 비롯된 것임이 분명하지만 그의 일부 작업물을 접한 이후, 단정된 것이기도 합니다. 대표적인 예가 3년여 동안 그의 카메라에 담겨온 일련의 '아르바이트 시리즈'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몇 번의 그룹전을 통해 일부 선보인 바 있는 이 시리즈의 하단에는 언제나 사진 속 주인공의 이름과 수입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때때로 사람들은 논현동 주유소 아르바이트는 시급 3,000원이라거나 20여 년을 거의 변함 없는 디자인의 유니폼으로 손수레를 밀고 골목을 누비는 '요구르트 아줌마'가 살인적인 경기침체와 실업난을 겪고 있는 2003년에 벌어들이는 하루 일당은 3,4만원이라는 단순하고도 표피적인 코멘트의 지배를 받지만 이것은 정작 그가 말해주고 싶은 본질에서 슬쩍 벗어난 것일 거라는 추측을 해본 적이 있습니다. 사람 좋아하고 그래서 술도 좋아하여 간혹 실없는 소리도 툭, 툭 하는 그이고 보면 영 틀린 생각도 아닐 것 같아요.
앞에서 저는 그가 그닥 <진지해보이지 않는> 사람이라고 말했지만 가만 생각해보면 약속 없이 모인 술자리가 깊어질 때면 누가 듣거나 말거나 농담처럼 이런 말들을 한 적이 있긴 해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를 발견하는 것과 동시에,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은 우리가 살아있다는 것이다> 같은 앙리 까르티에 브레송의 그 자체로 산문이자 격언 같은 것 말입니다. 그의 아르바이트 시리즈에 담긴 직업으로서의 '아르바이트'는 사실 너무 사소하고 흔한 것이라 그리 대단한 발견이라고 할 수는 없어요.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이 평범한 사진들은 우리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 세계의 한 단면이기도 할 것입니다. 동시에 점점 더 짧아지고 있는 문명 명멸의 주기를 생각한다면 아마도 머지않아 한 장의 사진으로 남겨지고 말 것들도 있겠지요. 어쨌든 롤랑 바르트의 말을 빌지 않더라도 모든 예술 작품, 그 중에서도 사진 작품 앞에서는 어쩔 수 없이 그 사진에 담긴 이미지를 최초로 고정시킨 사진가의 의도와 마주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 마주침은 개개인의 경험과 주관에 따라 각기 다른 방향에서 이해될 테지요. 이를테면 80년대, '요구르트 아줌마'였던 가족을 두고 있는 제게 이문동 시장 한가운데서 수줍게 웃고 있는 2003년의 '요구르트 아줌마'는 애틋하고 정겹습니다. 초단위로 달라지는 이 도시의 풍속 안에 아직도 아날로그적 행보를 보이는 풍경이 있음에, 그 공존이 새삼 고마워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동숭동 카페의 2,500원 시급의 웨이추리스를 담은 사진에서 저는 또 지나간 연애의 시간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날은 춥고 기다림의 시간은 길어져 저녁을 굶는 대신, 가난한 지갑을 열어 웨이추리스의 2시간급의 비싼 커피를 홀짝이던 지난 겨울의 어떤 나날이 삽화처럼 명멸하는 것입니다. 그때, 한때 연예인이었으며 지금도 연예인이지만 브로드웨이까지 진출했다는 토종 공연의 기획자이기도 한 남자가 앉아있는 그 자리에 앉아 그와 같은 자세로 기다림의 시간을 견뎌냈던 제 모습이 떠올라 슬몃 웃음이 나는 거예요. 아마도 그래서 그의 <아르바이트 시리즈>가 좋은가 봅니다. 물론 제 편견 내지는 편애의 '관계맺기'가 어김없이 작용한 것이기에 비정규직이 내포한 어쩔 수 없는 그림자들, 그 한컷 한컷의 사진들이 내포하고 있는 굴절된 현대 사회의 단면들과 같은 다소 정치적이고 시사적인 의미는 뒷전으로 미뤄둔 채 말입니다. 그저 제가 아는 공간, 랜드마크를 배경으로 어디선가 한번쯤은 마주쳤을 법한 이들이 제게 던지는 그 무심한 시선에 동화되어 사진 속으로 걸어들어간 저는 그 공간을 어슬렁거리며 그 '아르바이트'의 현장을 둘러보고 이내 지극히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사유를 시작하는 거지요. 해서 <아르바이트 시리즈>에 그가 붙여놓은 부연 설명들은 제게는 일종의 트릭처럼 느껴지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P의 개인전 소식을 들었던 건 아마도 한 계절이 물러나느라 몸살을 앓던 무렵이었을 겁니다. 그즈음은 계절만 몸살을 앓았던 것이 아니라 온 나라가 통째로 몸살을 앓던 중이었을 거예요. 달걀말이쯤 거저 내주던 그 실내포장마차에서 노여움과 슬픔과 안타까움에 젖어 보냈던 지난 겨울과 봄, 우리 모두는 몸살을 앓았었지요.
아무튼 뒤늦게 찾아온 꽃샘추위로 몹시 추웠던 그 날은 광화문에서 시작된 촛불의 행렬이 종로통을 지나 동대문 인근까지 이어졌다는 날이었을 거예요. 저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 습관처럼 들른 포장마차에서 아주 오랜만에 P를 보았지요. 늦은 밤이었고 P는 몹시 고단해 보였습니다. 형형하게 빛나는 눈을 빼고는 모든 게 먼 길을 돌아온 여행자처럼 빛바래보였지요. 서로의 근황을 주고받는 것으로 대화는 끊어졌고 그와 저는 말없이 술잔을 기울였어요. 그 계절 내내, P는 광화문과 시청 앞과 종로통을, 한강과 여의도를 헤매고 다녔습니다. 마치 자신이 이 나라에 남은 단 한사람의 사진가인 것처럼 홀로 분주했지요. 때때로 극성스러워 보일 만큼 말이예요. 하지만 그의 <극성스러움>은 그가 다큐멘터리 사진가의 길을 고집하고 있는 까닭의 연장선상에 있을 것이었습니다. 언젠가 그는 말했습니다. 우리 사회는 우리의 기록이, 우리의 손으로 우리가 기록한 이미지가 없다고요. 일제강점기는 물론이고 해방에 연이은 6․25전쟁, 60년대 청계천과 7,80년대 광포했던 우리 사회의 그늘이 대부분 외국인에 의해, 그들의 시선으로 기록이 되어있다고 말하는 그는 웃고 있었지만 저는 그 웃음이 텅 비어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었지요. 아마도 그는 사진가로서 일종의 부채의식을 스스로 만들어 짊어진 것 같았습니다. 그때 저는 P의 앞으로의 행보가 매순간 버전-업되고 있는 그 '몸살'의 징후에서 후유증에 이르는 일련의 기록이 되리라는 지극히 주관적인 단정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광화문과 여의도와 한강을 헤매며 그가 기록한 '우리의 기록'들에서 그때 제가 내렸던 그 <주관적인 단정>이 아직 유효하며 적절한 것이었음을 느낍니다.
얼마 전, 저는 인사동의 주말 북새통 속에 P와 우연히 마주친 적이 있습니다. 마주쳤다기 보다 제가 P를 발견했다는 표현이 적절할 것 같아요. P는 종로에서 안국동 방향으로 뻗은 인사동 거리의 첫 번째 사거리 한복판에 서 있었습니다. 장마가 시작되기 전이긴 했지만 그래도 날은 더웠고 해는 정수리에 눈을 박고 있는데 P는 카메라를 앞에 두고 5천년을 산다는 아프리카의 바오밥나무처럼 우뚝, 서 있었지요. 그 날, 인사동 거리,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그 사거리에서 누군가를 몇 시간째 기다리는 중년의 사내에게로 향해 있던 P의 렌즈가 어찌 세속적 관심이었겠어요. 그 사내를 무더운 휴일 한낮, 사거리로 이끈 불가항력, 그 불가항력에 이끌리기까지의 시간 유추이자 동시에 숨막히도록 번잡한 인사동의 수많은 인파 중의 하나이면서 전부에 대한 끈질긴 탐색이었을 테죠.
생각해보면 저의 좋은 친구인 P는 이 땅의 크고 작은 <다사다난>의 중심에서 한번도 나온 적이 없었습니다. 공적(公的)과 사적(私的)의 지극(至極)을 그는 기꺼이 그리고 쉼없이 오갔습니다. 이 도시는 치유불능의 숙명적 불면증을 앓고 있고 해서 그의 렌즈 역시, 이미 오래 전, 감염되었으니까요. 어딘가 조금은 허랑해보이는 발걸음으로 냉혹한 이 도시 곳곳을 헤매며 사물과 현상과 그것들의 주체이자 객체인 인간(혹은 삶)을 채집하러 다닐 겁니다. 그리하여 그의 렌즈는 눈 감을 새가 없습니다.
형! 그래서 P의 전화를 받은 순간 어쩌면 제 고민의 대답은 P에게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저는 무더운 여름 한낮의 식물원, 그 비현실적인 공간에서 문득 떠올렸던 것입니다. 일찍이 엥겔스는 경향문학에 대한 언급에서 정치적 주장이 <명시적으로 지적되지 말고 상황과 행위 자체로부터 저절로> 우러나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 말이 어찌 경향문학이나 정치적 주장으로 국한될 수 있겠어요. 무엇을 어떻게 왜 써야 하는가라는 다소 진부한 저의 고민은 P가 가끔 술자리에서 중얼거리던 브레송의 말처럼 세계를 발견하기 위한 끊임없는 자각과 각성에서 먼저 출발해야 할 것이며 P의 렌즈가 담아내고 있는 이 땅의 모든 사소하고 평범하며 때때로 남루하기까지 한 주변인들에 대한 애정에서 '저절로' 쓰여지지 않을까요? 이 도시 곳곳을 헤매고 다니는 P의 대책없는 열정이야말로 해답이라는, 어쩌면 다소 생뚱맞기도 하고 어이없기도 한 생각이 쇄골 아래께에 둔중한 통증으로 다가왔던 거예요.
그나저나 P의 부탁을 어떻게 거절해야 좋을까요?
비감어린 목소리로 사는 게 뭐 이렇게 시시하냐며 괜한 청승을 떤다면, 소주 한잔을 원샷으로 탁 털어넣으며 눈길을 45도 각도쯤으로 슬쩍 내리깐다면 아마도 마음 약한 그는 무슨 일인가 싶어 지레 눈이 깊어 질 겁니다. 그리하여 어깨를 툭, 툭 치며 사는 게 원래 그렇다 식의 선소리로 서툰 위로를 적절하게 우회할 테죠. 그즈음, 나, 한 줄도 못썼는데, 우물거려주면 그 특유의 건들거림으로 됐다, 마, 잊어뿌라, 호쾌한 사투리와 함께 잔이 넘치도록 소주 한잔을 따라줄 겁니다. 좀 치사한 방법이긴 하지만 어쩔 수 없어요. P의 청을 들어주고 싶은 심정과 쉽지 않은 현실 속에서 P를 잃지 않기 위한 방법일 뿐이니, 아마 그도 용서할 거예요. 틀림없이. 그렇죠? 이만 줄입니다. 저는 이제 어쨌든 다시 걷기 시작했습니다. 형의 건투를 기원하겠습니다. 내내 건강하세요.
추신 : 이 편지의 수신자인 형과 다큐멘터리 사진가인 P가 어떤 관계인지 짐작하셨다면 조금은 쑥스러울 형에게 - 현해탄 건너 상 받으러 갈 예정이라지요. 진심으로 축하해요. 형은 충분히 자격 있어요. 이것도 편견 내지는 편애에서 비롯된 판단일테지만 어쩌겠어요. 형은 제법 괜찮은 다큐멘터리 사진가이며 내 좋은 술친구이고 무엇보다 그런 대로 쓸만한 남자이니 편견이건 편애이건 어쩌겠냐구요.
* 「거꾸로 선 꿈을 위하여 3」 중에서 (진이정, 거꾸로 선 꿈을 위하여, 세계사,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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