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노라마 배율과 신 다큐 사진의 탄생

반이정, 미술평론가


약력에 기재된, Area Park의 전공은 학부 석사 각각 보도사진과 다큐멘터리다. 연유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사진의 역할 중 현장 기록과 고발에 매료된 결정이 반영된 것일 게다. 2004년 가을 Area의 첫 개인전의 어느 후미진 공간에 크게 출력된 여의도 농민집회 풀 샷이 걸려 있었다. 또 비에 젖은 광화문에서 종각으로 행진 중인 라이트 밝힌 장갑차 부대의 2열 횡대(국군의 날 행사의 일환으로)가 종심 깊게 사선을 그리는 사진도 보였다. 더욱이 같은 해 3월경 촬영된 걸로 짐작되는 탄핵반대 집회군중의 세종로 점거 사진 속에서 시위 피켓을 가슴팍에 치켜 올린 말쑥한 정장 차림 회사원은 그 무렵 쏟아져 나온 기록 사진의 평범한 면모로 보였을 뿐이다. 하지만 같은 전시공간에 함께 출품된 일군은 기록 사진 일방주의를 견제 중이었는데, 바로 '직업별 노임 대조표(필자가 임의로 이름 붙여봤다)' 연작이다. 대체로 실외에서 돈벌이를 하는 직업군(주유소 직원, 내레이터 모델...)의 업무 현장을 잡은 파노라마 연작이었다. 뒤에서 얘기할, 올 12월 Area 2회 개인전 <도시 소년>은 구성면에서 전작인 '노임 대조표'의 영감이 연장된 결과로 나는 이해한다. '노임 대조표' 연작은 카메라를 정면 응시하는 인물을 정중앙에 배치하는 일반적인 사진 작업군과 닮아있으나 6*17의 기다란 화면 비율 탓인지 개별 캐릭터가 화면 전체에서 주역이 못되는 형국이다. 길쭉한 화면 속에 묻힌 주인공의 작은 공간 할당은 화면을 전체적으로 황량하게 만들어버리는데 이런 난점은 개별 인물의 일일 노임을 옆에 기재해 보여줌으로써 해갈된다. 좀 색다른 다큐멘트인 것이다.

다큐멘트 사진에 관한 짧은 경험에 근거해 단정해 말하면, 조직의 협조 없이 혼자의 손과 발로 이동과 촬영을 수행하는 개인 사진가들에게 주어지는 다큐멘트의 소재는 생각보다 훨씬 제약되어 있을 게 분명하다. 그것은 탄핵같이 역사상 한번 있을까 말까한 정치 사건, 일 년에 딱 한번 있는 국군의 날 중무장 기갑부대의 도심 진입(흔히 퍼레이드라 불리는)행사, 그리고 각 이해단체의 비정기 집회 현장 정도일지도 모른다. 이렇듯 제한된 소재와 제한된 구도를 인화지에 옮기면서 일부는 타는 갈증을 느낄 테고, 일부는 정형화된 다큐 제작 노하우에 안주할 것이다. 그 중 다수는 뉴스 지면에 기사 내용을 보조하는 현장 사진을 제공할 테고, 소수는 찍어둔 사진을 선별해 기획전에 출품할 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인지 관객이 만나는 다큐멘트 사진이 발언 수위와 그 틀 거리 면에서 대게 다르지 않은 이유는 이런 사정 때문은 아닐까? 지난해 Area의 첫 개인전이 비연출 현장 연작과 연출 '노임 대조표' 연작의 결합으로 구성된 건, Area가 종래의 다큐멘트 전통을 갱신하려는 의지와, 작가주의를 결합시키려는 고민을 보여준다. 더욱이 지난 행보를 살펴보면 그는 현장보다는 화단의 평가를 받고 싶어 했던 걸로 사료된다. 명함에는 다큐멘터리 사진가라 기재했지만, '다큐 정신을 지향하는 작가주의 사진가'라 불리고 싶었을 지도 모른다. 그는 현장성과 작가주의 사이를 조율한 비율은 6*17이다. 말하자면 파노라마 방식이 그 해법이었다. 익명적인 집회 장면에 투입된 파노라마의 스펙터클은 집회 장면의 정치성을 희석하고 만다. 한편 2회 개인전 출품작의 소년소녀와 1회 개인전의 '노임 대조표'속의 청년들 역시 파노라마의 틀 거리 안에 갇히면서 대략 35%의 화면 안배만을 받는다. 인화지 절반 이상에 들어 차, 관객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종래의 정면 응시 인물 사진군과는 반감된 혜택인 셈이다. 다큐멘트의 멘탈리티를 파노라마의 형식성에 담는 건, Area가 선택한 절충안이다. 이상하게도 Area에 관한 종래 3편의 글 속에서 파노라마의 비중은 크지 않다. 그보다 천민자본주의라 폄하되는 한국적 상황의 기록성에 주목하고 있다. 필자 중 최봉림만 "작가는 다큐멘터리사진, 포토저널리즘이라 불리는 사진적 관행들이 상습적으로 행하는 주관적 선택과 배제의 프레이밍을 거부하기 위해 파노라마 카메라의 폭 넓은 시선과 무작위적인 프레이밍을 선택한 것이다. 그리하여 작가의 이데올로기, 이해관계, 취향을 주입시키면서 객관성 혹은 휴머니즘을 표방하는 전통적 다큐멘터리 사진과 포토저널리즘에서 벗어났다."라는 참으로 지당한 말씀을 남겼다(동감한다). 작가가 도록 맨 앞에 표방한 신 기록 사진(new documentary photography)이란 주로 오락물을 위해 고안된 파노라마의 형식을 진중한 현장 고발의 옷으로 입히려는 그의 작업관을 대변한다.
파노라마(panorama)란 무엇인가? 파노라마는 흔히 사진과 영화의 재현 방식으로, 한물 간 방법론으로 통한다(특히 영화에선). 그것이 처음 고안되었을 시, 대중적 볼거리 제공이 주요 이유였다. 웹스터 영어사전은 파노라마를 전 방위를 보여주는 시야(A complete view in every direction)로 정의한다. 즉 전후좌우의 전 방위 시계를 한 면 위에 펼쳐놓는 걸 의미한다. 하지만 광의의 뜻은 좌우로 길쭉하게 늘어진 와이드 스크린이나 필름 포맷을 의미하며 Area는 여기에 속한다. 그리스어 pan(all)과 horama (view)의 조합으로, '전체적 조망'의 어원을 갖는 파노라마는 1792년 런던 에든버러의 전경을 원통형 구조물 위에 채색한 스코틀랜드 화가 로버트 바커(Robert Barker)와 연관된다는 게 정설이다. 종래의 다큐 사진이 일반 카메라의 2*3 비율 속에 중요한 쟁점을 담아와 관객의 시선을 모으려는 데에 반해, 상업적 고려로 고안된 6*17 비율 파노라마로 걸러진 다큐멘트는 작가가 주목하는 사건 속 주인공을 정중앙에 배치하나, 거의 동일한 비율의 좌우 공간의 압박 속에 3분의 1의 빠듯한 역할 수행에 그친다. 직설법적 고발 기능은 약화된 셈이다. 좀 오바해서 말하면, Area의 파노라마 연작 중 일부는 3등분하면 3개의 개별 작업으로 감상이 가능할 정도이다.

예를 들어 [롯데월드]는 좌에서 우로, '호수를 낀 롯데월드 본관 / 매직 아일랜드 / 황량한 고층빌딩'으로 독립 구분된다. [모 회장의 자살현장]은 좌에서 우로, '로케 나온 촬영 팀과 한강/ 대기 중인 기자와 경찰 경비정/ 투신 현장과 교각' 으로 삼등분된다. 이런 '3등분 가능이론'을 억지로 역설하지 않더라도, 파노라마에 담긴 다큐멘트는 본령의 일부는 포기해야한다. 그건 Area의 계산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설령 파노라마가 아닌 일반 카메라가 담아낸 여느 다큐멘트 역시 전시 공간 안에서 하나의 자성의 기록물이기 보다, 감상의 대상으로 간주될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기록 및 고발(정치성)과 작가주의(탈정치성)의 중간 지점을 고민한 것으로 보인다. 금번 전시 제목은 <도시 소년 Boys in the city>인데, 나는 전시 관람후, 도록을 받아들고서야 제목을 알았다. 작품 대부분이 도시를 배경으로 청소년의 생활을 담고 있지만 도시 소년으로 보기엔 그들의 역할이 너무 작아보였다. 이것을 "막대한 자본의 힘을 이용해 서서히 소년들의 감성을 자극하고 나아가 정신적인 체계마저 통제(작가의 글)"하려는 도심 상업자본의 풍경화로는 보이지 않았고, "사진으로 찍힌 것은 소년들의 삶의 태도와 어른들의 삶의 태도 사이의 간극(이영준의 글)"으로 해석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 이유는 스펙터클의 와이드 스크린 효과와 더불어, <도시 소년> 속 등장 소년소녀와 그의 배후의 쇼핑센터가 결코 그들만의 것이 아닌, 관객 일반이 '이미 깊이 연루된' 환경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를 테면 [등 돌린 소년과 퓨마]에서 붉은색 대형 퓨마 쇼핑백으로 하반신을 가려진 소년을 두고 다국적 퓨마가 물어버린 제 3세계 소년으로 읽는 건 억지 같거니와, 화면 전체 비율로 봐도 주변의 역동성이 제한된 해석을 견제하기 때문이다. 파노라마 특유의 스펙터클로 메시지가 탈정치화 될 우려를 완화시켜주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다시 파노라마다. 파노라마의 취지는 좌에서 우로 시선을 움직여 전경을 두루 살피는 효과인데, Area의 파노라마는 정중앙의 인물에게 먼저 꽂힌 시선이 좌우로 분산되었다가 다시 중앙으로 돌아오는 과정이다. 이 과정에서 3등분된 화면 사이의 긴장을 요하는 수초가 흐른다. 시선이 정중앙에서 좌우로 분산되었다가 환원하는 과정, 그리고 정중앙의 인물과 좌우 오브제 사이의 긴장을 고려하는 것이 Area의 절충된 다큐멘트의 요체다. [태권소년]이 외대 앞 횡단보도 정중앙에서 카메라를 응시한다. 시선은 교통 적신호에 걸려 소년에 이르나, 우측에서 진입하는 붉은 티 소녀의 견제를 느낀다. 한편 태권도 부원 단체 사진도 우측에서 끼어드는 붉은 머리띠에 붉은 소매를 한 소녀의 방해를 받는다. [인라인 스케이트 레슨]은 미끄럼틀 정상의 소년들과 그들을 우측에서 응시하는 소년의 빨간 모자챙이 약 30도의 비스듬한 사선으로 연결된 걸 알 수 있다. 하다못해 [길 건너편의 커플]에서 우측 가로수의 몸통에는 용도불명의 붉은 띠가 묶여있다! 또 1회 개인전 출품작 [하루 평균 40만원 버는 Serah(25)]는 정작 주인공 Serah의 육감적 도발보다 우측에서 렌즈에 살짝 걸친, '누가 봐도 포주일 거 같은' 붉은 체크 재킷 중년에게 시선이 빼앗기고 만다. (종합해보니 우측에서 개입하는 모든 방해물은 죄다 '붉은' 색이네?!) 주제를 주인공에게 일임하지 않아 직설법을 경계하고, 파노라마의 대중적 볼거리에 사회적 현안을 담아, 천박한 스펙터클을 견제하는 것, 이것이 Area가 택한 '절충적 다큐멘터리'이다.

ps. 듣자하니, 이번 전시 오프닝에 촬영된 소년 소녀는 초대하지 않은 모양이다. 동참에 응한 일원으로 최종 결과물을 보는 도시의 소년들의 견해도 듣고, 피드백을 받는 것도 좋을 터이니, 다음부턴 초대하는 것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