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섬광, 사진의 섬광

진동선


사진에 대한 인간의 소망은 언제나 존재론적이다. 시간의 그림자가 사진의 영혼이고, 사진의 영혼이 곧 시간의 해골이다. 사진은 육체가 아닌 육체의 이미지일지라도 육체를 알고 있는 우리는 사진을 언제나 육체로서, 몸과 정신의 항등성으로 생각한다.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는 존재론적인 관점에서 사진을 "시간의 죽음"으로 인식한다. "생애 단 한번 일어난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의 파편"이라는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사진은 발명된 이래 그 중차대한 질문이 "사진의 본질은 무엇인가?"였다. 끝없이 유효한 이 질문 너머에는 시간과 존재가 있다. 사진은 시간의 존재 때문에 찍혀지고 존재의 시간 때문에 의미화 된다. 그래서 우리의 모든 사진적 행위는, 또는 모든 사진의 결과물들은 목적과 용도에 관계없이 시간의 채집이고 존재의 채집이다. 이 세상 그 어떤 사진도 시간의 채집, 존재의 채집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것이 없다. 사진은 언제나 그것들의 관계망 속에 있다.1)

이 때문에 사진의 신화성을 "단 한번, 바로 그때, 두 신체 사이의 운명적 접촉"이라 하지 않던가! 사진의 불멸성은 언제나 시간과 존재의 불멸성이다. 세월이 흘러도, 놀라운 기술의 변화와 사람들의 인식과 태도가 돌변해도 사진의 불멸성은 여전히 단 한번, 바로 그때, 존재한 순간성이다. 또 사진의 신화성 역시 순간 너머에 있는 영원성이다. 한 장의 사진은 예술과 개념 이전에 순간과 영원을 통해 인식하는 덧없음이며, 그 덧없음이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의 찰나성임을 보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사진의 본질이다.

한 장의 사진은 그곳의 빛, 그곳의 시간, 그곳의 존재를 지시한다. 순간의 빛과 시간의 덧없음 앞에 촬영자가 서 있고, 피사체는 방사하는 빛 속에서 시간의 파편으로 날아온다. 그리고 어느날 구경꾼은 전시장에서 이를 바라본다. 하여, 사진을 바라본다고 하는 것은 이 세 가지 사건, 즉 시간의 존재, 시간의 잔상, 존재의 시간성을 더듬는 일이다. 세상의 사진은 찍고 날아오고 보는 세 가지 존재 행위 속에 있다.

박진영(Area Park)의 사진은 이런 존재론적 인식 속에 있다. 제목 <히다마리>는 '찬란히 떨어지는 빛'이라는 뜻의 일본말이다. 사진을 처음 보았을 때, 그리고 제목을 읽었을 때 롤랑 바르트의 "사토리"를 떠올린 것도 우연이 아니다. 사토리는 '홀연한 깨달음'의 일본말이다. 바르트는 <카메라 루시다>에서 이 말을 '섬광'이란 뜻으로 환유한다. 그러니까 섬광은 물리적 순간(시간), 존재론적 순간(빛), 인식론적 순간(덧없음)이 동축으로 연결된 "잠깐 동안의 허무(the passage of a void)"이다.2) 홀연한 깨달음은 잠깐 동안 발생한 물리적 섬광으로부터의 찬란한 존재의 인식, 그리고 덧없이 사라지는 허무의 자각이다. 바로 사진의 본질이고 존재론적 현상학이다. 사진은 시간의 섬광, 존재의 섬광, 바라봄의 섬광에 다름 아니다.

박진영 의 "히다마리"는 물리적 순간, 존재론적 순간, 인식론적 순간과 동축으로 연결되어 있다. 사진의 본질이라 할 수 있는 시간, 존재, 시선의 섬광 속에 있으며, 또 그가 자신을 향해 던진 화두, '사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세 가지 섬광의 지표(index) 속에 있다. 히다마리에서 그가 맨 먼저 중시했던 것은 '빛의 존재성'이다. 사진에서 빛은 "존재의 피부"이다. 빛의 자국이면서 동시에 피부이고 빛의 옷이다. 빛의 존재성이란 사진의 존재성이며 찰나로부터 빛의 자국, 빛의 걸음, 빛의 지문들을 훑는 것이다. 이것들이 어둠의 방(camera obscura)에서 일어난다. 사진의 본질은 그래서 "이마고 루시스(imago lucis), 즉 빛의 유령이다. 유령은 육신 없는 존재. 발광과 섬광의 이미지이며, 순간 속에 나타났다 사라지는 덧없음과 찬란함의 기표이다.

"히다마리"에서 본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찬란함"의 인식이다. 찬란함은 빛의 방사이다. 즉 섬광의 상징이다. 빛의 방사, 빛의 사출은 물리적이면서 동시에 정신적이다. 빛의 찬란함은 날아옴으로서 존재한다. 대상 그곳으로부터 빠져나온, 그리하여 지금 나에게 날아오는 섬광으로서 지각이다. 모든 사진은 방사다. 찬란함은 '분리'의 상징이며 육체로부터 날아온 이미지의 정령이다. 존재의 빛이 태양, 달, 별로부터 분리되듯 사진도 결국 대상으로부터 분리된, 육체의 정령으로 탈각된 존재에 대한 분리의 인식이다. 존 버거(John Berger)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시계(視界)와 빛은
서로를 향해 달려,
그들의 포옹으로부터
낮이 태어난다.3)

낮은 사진이다. 또 '한때'라는 시간의 초상이다. 존 버거의 말처럼 사진은 한때의 시간 속에 있고, 한 때의 공간 속에 있다.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처럼 한때는 곧 덧없음이다. 덧없음은 모든 시간의 초상이다. 존재의 삶도, 사진의 삶도 한때의 시간, 한때의 공간 속에 있다. 두 가지 한때 속에서, 그 사이를 배회하는 육체의 시간과 정신의 시간 속에 있다. 바로 히다마리의 의미망이다.

"히다마리"는 '렌즈(빛의 구멍)를 통해서 본 한때'를 지시한다. 바늘구멍 저편 아득한 곳으로부터 날아온 찬란함의 한때를 사진의 시원성으로 이끈다. 사진을 본다는 것은 시간을 보는 것이다. 어떤 경험의 시간과 공간의 시간을 보는 것이다. 그래서 사진은 시간에 대한, 공간에 대한 두 가지 나뉨이고 파악이다. 지켜본 시간과 돌아본 시간 속에 있고, 존재했던 자리와 떠나간 자리 속에 있다. 이 거리감이 또한 히다마리의 의미망이다. 찬란함은 궁극적으로 거리를 전제로 한다. 사진은 거리로부터 태어나고 자라고 죽는다.

"히다마리"에서 마지막 중요한 것은 "떨어짐"의 인식이다. 떨어짐은 죽음이다. 바르트가 '사진은 죽음'이라고 말한 것도, 또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로 인식한 것도 찬란함 다음에 오는 죽음 때문이다. 사진은 죽음으로부터 태어난다. 사진을 시간의 해골이라고 하는 것도, 시간의 유령이라고 하는 것도 어떤 죽음 때문이다. 사진이란 소멸에 대한 재인식이다. 죽음으로부터 발견되고 고무된다. 존 버거는 이를 "삶의 작법의 비밀", "덧없음과 영원 사이에서의 연마", "죽을 수밖에 없는 짧은 순간의 성찰", 이라고 했다.4) 박진영 의 "히다마리"는 죽음을 공시적으로, 통시적으로 관통한다. 사진의 죽음을 존재론적 시각에서 바라볼 뿐만 아니라 현실의 시각에서도 바라본다. 그러니까 "찬란히 떨어지는 빛"의 의미는 디지털이라고 하는 현재의 사진의 모습에 대척에 서서 사진의 죽음으로까지 확장한다. 그에게 히다마리의 관계망은 깊은 존재론적 소망과 더불어 현실로부터 소멸하는 사진의 죽음과 맞닿는다. 전자가 사진이 태어나는 본질로서 육체(존재시간)의 죽음이라면 후자는 사진의 본질이 사라지는 오늘의 공간에서 정신(사진성)의 죽음이다. 암시의 섬광이고 발화(發話)의 섬광이다.

이제 처음으로 되돌아와서, 사진의 죽음 앞에서 "사진이란 무엇인가?" 되묻는다. 그리고 질문 앞에서 왜 그것이 "박진영 인가?"를 되묻는다. 도대체 왜, 어떤 연계 고리가 있는지 우선 내 자신부터 자기검증을 요구한다. 먼저, 사진이란 무엇인가?를 지금 물어야 하는 데는 시의성이 있다. 사진이 기술매체인 한, 유물론적 시각에서 사진의 본질을 탐색한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또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이 말한 것처럼 매체의 본질에 대한 탐색은 그것이 떠나갈 때, 사라지고 있을 때, 죽음에 이르렀을 때 성찰하는 것이 진정성이 크다. 즉 "모든 올드 미디어는 한때 뉴미디어였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순간, 사라진 매체의 본질이 새로운 섬광으로 빛난다.

문제는 그 물음과 성찰의 주인공이 "왜 박진영인가?"이다. 그가 이전에 존재론자였는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존재론자까지는 아니더라도 사진의 본질과 현상에 천착했던 인식론자이거나 관념론자였는가? 이도 아니었다. 내가 아는 그는 현실의 시계를 찼던 지극히 현실주의자였고, 현실 상황에 민감하게 반응했던 상황주의자였다. 그렇다면 그런 그가 <히다마리>를 통해서 사진 존재론에 다가선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의 정당성은 어디에 있는가? 이에 대한 오랜 고민과 자기검증의 시간은 작가의 <작업노트>, 그와의 문답 그리고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의 <눈과 마음>의 현상학에서 찾았다.

퐁티는 <지각의 현상학>에서 변화된 인식은 "새로운 불꽃의 타오름"으로부터 온다고 했다.5) 여기서 말한 새로운 불꽃의 타오름은 재인식의 눈이다. 박진영 의 변화된 인식은 새로운 환경으로부터 방사된 새로운 감각의 섬광인 것 같다. 그러니까 어떤 새로운 상황이 새로운 감각으로 격발된 것 같다. 홀연한 깨달음, 찬란히 떨어지는 빛이란 감각의 격발이다. 감각의 격발은 현실의 시계일 때 더욱 뜨겁게 타오른다.

"히다마리"를 통한 인식의 변화도 그가 현실주의자, 상황주의자였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본다. 그는 늘 현실 공간에 있었고 늘 자세히 흐름을 보았던 사진가다. 현실 속의 사진가는 근본적으로 자세히 보는 사람이다. 벤야민이 말한 것처럼 그런 사람은 부단히 깨달음의 산책자이고 찰나적 흔적 혹은 경과의 지표를 재인식하는 사람이다. 그는 징후에 강한 관찰자이다. 이 모든 것들은 현실 한 가운데 있는 자만이 얻을 수 있는 현대성의 성찰이다. 벤야민은 이를 세이차스(Seichas), 즉 순간의 시간으로서 '즉시성의 감각'이라고 했던 그것이다. 즉시는 시간에 대한 순간 인식이다. 섬광에 의한 자기 확장이며, 끝없는 보강이며, 쉼 없는 현실 인식이다. 현실의 시계만이 과거, 현재, 미래를 보게 한다. 현실을 걷는 자만이 지각하는 눈과 마음이다.

박진영 의 "히다마리"는 궁극적으로 현실의 눈이다. 현실에 기반한 현실 인식의 시선과 성찰이다. 그래서 근본주의자의 시선도, 원리주의자의 시선도 아니다. 그를 둘러싼 새로운 환경, 감각, 심지어 어떤 삶의 거리감까지 새로운 현실 인식이 새로운 변화로 이끈 것으로 보인다. 모든 인식은 거리에 대한 자각이다. 모리스 블랑쇼(Mourice Blanchot)가 재인식의 과정에서 "거리감"을 중요시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히다마리"는 재인식의 거리로부터 이끌어진 눈이다. 섬광의 유격(有隔)이었던 것 같고 거리의 접촉이었던 것 같다. 사진의 본질이 히다마리와 만나는 접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