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이미지와 이미지의 기억
- 박진영의 3.11 사진들의 맥락

이재현, 문화평론가


   1.
재앙을 뜻하는 영어 단어 disaster는 본디 점성술에서 생겨난 말이다. 점성술에서는 별(aster)이 제자리에서 벗어나(dis) 있는 경우에 재앙이 생겨난다고 보았던 것이다. 고대 중국에서 서양의 점성술에 상응하는 것은 바로 유교의 재이설(災異説)이다. 일본의 3.11 대지진에 대해서 그것은 천벌이라고 했던 도쿄 도지사 이시하라의 망언은 바로 그러한 종류의 사고 방식을 보여준다. 점성술이든 재이설이든 간에, 근대 이전의 사회에서 자연 재해를 의인화된 하늘의 뜻과 연결지어 해석하는 사회적 관행은 기본적으로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적 통치술에 불과하다.
   재앙을 별들의 일탈이나 천벌로서 다루는 이러한 술책에 대항하여 내가 대안적으로 제시하고 싶은 것은 constellation(독일어 Konstellation)이라는 개념이다. constellation이란 말은 일차적으로 별자리, 혹은 성운의 뜻을 지니는데, 벤야민은 그의 "역사철학 테제"(1940)에서 이 말을 배열, 배치의 의미로 사용했다(테제 17 및 부기 A). 오늘날 문화연구의 주요 개념 중에 재맥락화(recontextualization)라는 것이 있는데, 벤야민의 유물론적 역사 인식 및 서술에 있어서, constellation은 바로 그 재맥락화에 관련된 원칙이다. 그에 의하면, constellation은 연속적, 순차적, 나열적, 첨가적인 구성 원칙이 아니라, 혁명적, 단절적, 순간적, 섬광적, 메시아적인 구성 원칙이다.
   그런데, 우리는 3.11이라는 사건을 우리의 인식 지평에 구체적으로 어떻게 배치하고 배열할 것인가. 내 생각에 박진영 사진의 미덕은 무엇보다 바로 이러한 배치 내지는 배열 작업의 실마리를 효과적이고도 유력하게 제공하는 데 있다.
   박진영의 사진 "미스터 응웬씨에게" 연작과 "히라노씨에게" 연작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사진 속의 등장인물은 케이블 릴리즈를 쥐고 있다. 케이블 릴리즈는 인덱스(index)로서의 사진의 성격을 그 자체로서 단적으로 가리키는 도구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은염 사진술은 피사체로부터 나온 빛을 렌즈를 통해 감광 유제가 발라져 있는, 규격화된 크기의 필름에 고정시키는 기술이며, 필름 카메라는 바로 그런 기계이고 장치다. 사진의 형상적 기록성 내지 도상적 유사성은 바로 이러한 질료적 특성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으로 통상 이해된다.
   물론, 사진의 기록성이라는 것은 단지 질료적이고 기술적인 성격에서 자동적으로 생겨난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사진술을 둘러싼 문화적 제도 안에서 우리가 관습적으로 수행하고 있는 통념적 실천의 결과이기도 하다. 흔히들 회화와 비교해서 사진은 그러한 기록성을 원초적으로 갖고 있다고 믿고 있다. 그런데 그 믿음은, 사진이라는 장치를, 그것이 포함된 더 넓은 문화적인 제도 안에서 여러 가지로 사용한 실천적 궤적의 효과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뒤집어 말하자면, 사진의 기록성이라는 게 먼저 있고, 이를 바탕으로 해서 보도 사진, 증명 사진, 기록 사진 등이 분화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러한 장르적 화용론에 따라서 사진을 사용해 온 바의 집합적 실천의 귀결로서 사진의 기록성이라는 일종의 믿음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사진의 기록성에 대한 제도적이고 문화적인 통념에는, 특정한 시공간과 상황에서 일정한 거리와 시점(視點)을 선택해서 사진가가 셔터를 누른다는 당연한 사실이 다소간에 은폐되거나 억압되어 있기 마련이다.
   그렇지만, 디지틀 사진의 조작 가능성 내지는 재처리 가능성과 비교해서 말한다면, 은염 사진은 분명히 상대적으로 더 본원적으로 형상적인 기록성을 갖는 듯하며, 또 바로 그러한 기록성은 은염 사진 고유의 기술적이고 질료적인 성격에서 비롯되는 듯하다.
   셔터를 누른다는 행위는 바로 그러한 기록성을 작동시키는 가장 기본적이고 결정적인 행위인데, 박진영 작품 안의 케이블 릴리즈라는 도구는 바로 그러한 행위가 수행되고 있는 순간을 그 자체로서 가리킨다. 사진이 인덱스로서의 기호라고 한다면, 케이블 릴리즈는 인덱스의 인덱스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박진영 작품 속의 케이블 릴리즈는 3.11 직후에 내가 접한 보도 사진들 중의 몇몇을 곧바로 상기시킨다. 내 감수성과 상상력 안에서, 박진영의 케이블은 참고도판 1의 보도사진의 끈, 즉 벽의 못에 사진을 걸어두기 위한 끈을 상기시킨다. 또, 참고도판 2의 보도사진에서는 한 노인이 행방불명된 아내의 사진을 목에 걸고 있다. 사진들을 벽과 목에 걸어주고 있는 이 끈들은, 고유의 기록성에 바탕을 둔 사진의 형상적이고도 질료적인 힘을 시각적으로 명징하게 가리킨다. 사진은 그 고유의 형상적이고도 질료적 기록성으로 인해서 우리로 하여금 고인들을 기억하게 해주는 힘을 갖는 이미지인 것이다.
   그런가 하면, 참고도판 3의 보도사진은 기억의 이미지로서의 사진을 회수하려는 절망적이면서도 처절한 몸짓을 보여준다. 사진 속의 인물은 잔해 더미 속에서 흙탕물로 범벅이 되어 있는 앨범을 찾아내서 오물을 닦아냄으로써 가족과 친지에 대한 기억의 이미지를 필사적으로 확보하려고 한다. 사진에 붙어 있던 캡션에 의하면 이 사진 속의 인물은 할머니라는 것인데, 사진 이미지가 보여주는 거칠고 주름이 많은 손등과 싸구려 소맷자락은 이 할머니가 평생 동안 허드렛일을 계속해왔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나는 이 사진을 보면 가슴이 미어진다. 이 손은 바로 내 어머니, 내 할머니, 내 외할머니의 손이기 때문이다.

   2.
참고도판 3의 사진에 함축되어 있는 처절함과 격렬함과 비교할 때, 박진영의 사진들은 밋밋하며 가라앉아 있는 듯하다. 상대적으로 더 침착하고 온건하고 차분하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박진영의 사진들이 파국적이고 묵시론적이었던 3.11 직후의 상황보다는 상당한 시간이 흐른 뒤에 찍혔기 때문인 듯하다. 박진영은 그럼으로써 일정한 거리감을 획득할 수 있었던 것이다.
   거리두기는 무술 및 사회적, 심리적 행위에서뿐만이 아니라, 모든 종류의 지적, 예술적 작업에서도 필수적이다. 대상과의 일정한 거리를 확보하고 난 다음에야 우리는 지적으로나 미학적으로 성찰적인 작업을 수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전문가로서의 사진가는 늘 이러한 거리두기를 직업적으로 여러 방면에서 훈련하고 있다. 셔터를 누르는 행위는 단지 기술적인 것만이 아니고 최소한의 심리적이고 인지적이며 미학적인 거리두기를 요한다.
   전시 작품 중 "찍을 수 없었던 물건, 발견된 오브제"라는 타이틀이 붙은 트럼펫은 박진영이 이러한 사진적 거리두기에 실패했기 때문에 전시장에서의 현존이 가능해진 것이다. 박진영은 이 트럼펫에 관한 한, 사진가이기를 포기하고 자기의 인간성을 건진 셈이다. 나는 한편으로 그러할 수밖에 없었음을 이해하고 납득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전문적 사진가는 냉정하고 잔혹하게 셔터를 눌러야 하는 것이다, 사람의 목숨이 달린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아무튼 박진영의 사진 작품에서 우리가 일차적으로 읽어낼 수 있는 일정하고도 차분한 거리감이야말로 3.11 사건 당시의 뜨끈뜨끈한 보도사진들과 비교할 때 박진영 사진들만이 갖는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거리감과 관련해서 말하자면, 전반적으로 박진영의 사진은 3.11 당시 및 그 직후의 사건들 그 자체보다는 격렬한 사건들이 지나간 다음의 자취 내지는 흔적을 우리에게 시각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작업은 크게 두 종류로 나뉜다. 하나는 폐허가 된 재해 현장에서 박진영이 발견한 버려진 물건들을 모아놓고 찍은 것이다. 카메라들, 사진액자들, 란도셀들, 비너스 석고상, 정들, 음료수병들이 바로 그것이다. 다른 하나는 부동산이라고 묶어서 다룰 수 있는 것들이다. 미나미산리쿠의 어느 같은 장소의 폐허 건물들을 찍은 세 점의 연작 사진들, 그리고 이시노마키의 동상, 나토리의 사진관 자리 및 공동 묘지를 찍은 사진이 여기에 속한다. 리쿠젠타카타(나토리)의 야마하 오토바이 사진은 이 두 종류의 중간쯤에 위치하는 듯하다.
   이 두 종류의 사진들 모두에 공통적인 것은 이 사진들이 명백한 부재를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물건을 다룬 것이든 부동산을 다룬 것이든 간에 이 사진들에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보통의 경우를 놓고 말한다면, 엄청난 재앙을 겪고 있는 당시의 시점이든 아니면 그것이 일단 지나간 뒤의 복구와 부흥의 시점이든 간에 사람이 없을 수는 없다. 반면에 박진영은 사람이 없는 장면을 선택하는 전략을 취했다.
   일본 사진사에서 유명한 작가들인 야마하타 요스케(山端庸介)라든가 토마츠 쇼메이(東松照明)의 사진집을 들춰보면 재해 현장을 다룬 작품들에는 사람들이 많이 찍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야마하타 요스케가 나가사키의 원폭 투하 다음날에 찍은 사진들도 그러하고, 토마츠 쇼메이가 1961년이 되어서 찍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사진들도 그러하다. 아이에게 젖을 물리고 있는 여인을 찍은 야마하타의 사진(참고도판 4)이나 끔찍한 흉터를 남긴 여인의 얼굴에 카메라를 잔인하게 바짝 들이댄 토마츠의 사진(참고도판 5)은 한번 보고나면 결코 잊을 수 없는 그러한 작품들이다.
   이에 반해서, 박진영의 사진에는 사람들이 등장하지 않는다. 그 대신에 거꾸로, 이러한 부재의 장면은, 다소간의 미묘한 차이가 있기는 있지만 대체적으로 침묵 내지는 적막감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런데 이 침묵 내지 적막감은 완전한 공백이나 공허와는 다르다.
   버려진 물건들을 모아놓고 찍은 사진들의 경우, 우리의 시선은 일차적으로는 바로 그 물건들의 이미지들을 향하게 되지만, 일단 그 이미지들의 도상적 의미를 이해한 다음에는 물건들이 놓인 바닥으로 옮겨가게 된다. 이 바닥에는 흙, 먼지, 여러 가지 미세한 조각과 부스러기들, 그리고 희미하게나마 찍혀있는 발자국과 뭔가가 눌리면서 끌려 스쳐지나간 자취들, 그리고 놓인 물건들의 때로는 희미하고 때로는 뚜렷한 그림자들이 있다. 전반적으로, 모아 놓여진 버려진 물건들과 폐허가 된 바닥은 서로 명백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심지어 나는 물건들을 모아놓지 않고 바닥 자체만 찍었으면 어떠했을까 라고 상상해보게 된다.
   바닥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물건들이 놓이는 곳이고 생명이 살아가는 장소이고 사건들이 일어나는 근거이다. 그 바닥이 든든하고 굳건한 한에서 우리는 생산과 노동을 할 수가 있고, 또 예술이라든가 여러 정신적인 작업 등을 성찰적으로 수행해낼 수가 있다.
   엄청난 쓰나미의 순간과 현장을 다룬 3.11 동영상이나 사진 등에서 우리가 숭고의 정서를 느낄 수 없는 이유는 바로 지진이라는 것이 우리가 서있는 바닥을 흔들어버리기 때문이다. 땅바닥이 흔들리고 갈라지는 상황에서는 소위 역학적 숭고 따위를 느낄 수는 없는 것이다. 숭고에도 바닥이 필요한 법이기 때문이다. 바닥이 없으면 오직 공포와 경악만이 있을 뿐이다. 물건을 모아 찍은 박진영 작품들은 바로 그러한 바닥의 의미를 잘 음미할 수 있게 해준다.
   묘지와 사진관 터를 찍은 사진들은 평화롭고 평온하게 보일 정도까지의 적막함을 보여준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전혀 나오지 않는 이 사진들에서 지평선은 세로 폭의 1/3 정도 아래쪽에 위치하도록 설정되어 있다. 그래서 하늘은 세로 폭의 2/3에 가깝게 넓게 자리잡고 있다.
   묘지의 비석들은 상당수가 쓰러져 있고, 지평선의 빈약하고 엉성한 나무들도 쓰러질 듯 비틀거리면서 겨우 서 있다. 사진관 터를 다룬 사진의 지평선 위에는 주의해서 봐야만 보일 정도로 희미하게 집들과 전봇대, 전기줄, 그리고 크레인등이 놓여 있다. 아니 놓여 있다고 하기보다는 소멸되어 가는 듯 보인다. 묘지 사진은 그 자체로, 그리고 사진관 터는 지평선에서 아주 희미하게 소멸되어가는 듯한 집들 때문에 우리에게 헤테로피아(heteropia) 내지는 헤테로크니(heterochrony)의 상황을 보여준다.

   3.
박진영이 이러한 적막함의 순간, 혹은 헤테로피아와 헤테로크로니의 경지를 사진으로 고유하게 포착해내게 된 것은 작가 자신이 일본 사회에서는 주변인이기 때문이 아닐까 하고 나는 생각해 본다. 즉, 일본인 여성과 결혼해서 도쿄에서 살고 있는 한국인, 더 정확하게는 도쿄의 라면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자이니치(在日) 한국인 사진가로서의 박진영이란 존재는 일본 주류 사회에서는 주변인이다. 박진영이 바로 그러한 주변인이기 때문에 3.11 이후의 난민적 상황에 고유한 적막한 부재를 사진에 담아낼 수 있었던 것이라고 나는 해석한다.
   3.11 오후 2시 46분 직후 한 시간, 혹은 그로부터 24시간 내지는 48시간의 상황은, 이미지 기호의 도상적 의미는 괄호 안에 넣고 그 조형적이고도 기표적인 효과만 가지고 말한다면, 내게, 일본의 전통 이미지 중에서 막부 말기 및 메이지 초기의 우키요에 화가 에킨(絵金, 본명 弘瀬金蔵, 1812-1876)의 '전통 연극 병풍 그림(芝居絵屏風)'들을 연상시킨다. 그 중에서도 특히, 모함을 받아 죽은 여인의 유령이 그릇을 하나둘씩 세어나간다는 유명한 설화이자 일본 전통 인형극인 분라쿠(文楽)의 소재가 되기도 했던 것을 그린 작품 "파주명옥부철산하옥부(播州皿屋敷鉄山下屋敷)"는 살벌하고 처참한 광경을 아주 극단적이고 충격적인 기표들을 통해서 드러낸다(참고도판 6).
   또, 내가 보기에, 에킨의 그러한 이미지는, 도상의 의미 내용이라는 점에서는, 일본 에도 시대의 정보 미디어인 가와라반(瓦版, かわらばん)에 등장하는 재해 이미지들과 서로 연결되는 듯하다. 그 예로서는 1896년의 메이지 산리쿠(三陸) 지진을 묘사한 목판 다색 우키요에(참고도판 7과 8)를 들 수 있다.
   현대에 들어와서, 1945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떨어진 사건과 관련해서, 우리가 특별히 기억해야 두어야 할 재해 이미지로서는 마루키 이리(丸木位里, 1901-1995)와 마루키 토시(丸木俊, 1912-2000)부부의 "원폭의 그림(原爆の図)"이 있다. 또, 일본인이 세 번째로 핵 재난에 처한 사건인 제5후쿠류우마루(第五福竜丸)호 피폭 사건을 오카모토 타로(岡本太郎, 1911-1996)가 묘사한 벽화 "내일의 신화(明日の神話)"도 기억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러한 일본의 재해 이미지들은 스모에서처럼 작가들이 재앙과 정면으로 맞붙어 격렬하게 대결한 소산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비교할 때, 박진영의 사진은 너무 차분하고 담담하다. 한 발 물러서거나 비껴서서 거리두기를 한 느낌이 역력하다. 나는 바로 이러한 거리두기는 주변인으로서의 박진영이 채택할 수밖에 없었던 이미지 전략이라고 생각한다.
   3.11은 일본 사람들 전부를 난민으로 만들었다. 이 말은 전혀 과장이 아니다. 직접 재해를 입은 태평양 연안의 동북 지역은 물론이고, 조금 떨어진 관동 지역, 그리고 더 떨어진 관서 지방과 그보다 서쪽의 나머지 지역도 방사능 물질의 누출로 인한 일상적 공포에 떨고 있다.
   박진영의 사진은 재해 그 자체보다는 재해의 자취 내지는 흔적을 상당히 적막한 토운(tone)으로 묘사한다. 야마하타 요스케 및 토마츠 쇼메이의 다큐멘터리 사진이나 3.11 직후의 보도 사진과 비교해 볼 때 이는 너무 명백하다. 그런데, 재해 한참 후에 사람들이 부재하는 적막한 풍경 씬(scene)을 일부러 골라 찍은 박진영의 차분한 사진적 묘사야말로, 이제 일본 사람들이야말로 알고보니 모두 난민이라는 사실을 함축하고 있다. 바로 그런 점에서 박진영의 사진적 성취는 이부세 마스지(井伏鱒二)의 소설 "검은 비(黒い雨)"(1965)에서 문학적으로 형상화된 서사적 방법 및 수준과 상통한다.
   물론, 일상현실의 감각이라는 면에서 보자면, 산리쿠(三陸) 지역 및 미야기현의 동부 지역, 그리고 후쿠시마현 동부지역인 하마도오리(浜通り)에서 직접 재해를 입은 사람들과 나머지 일본 사람들이 느끼고 있는 것은 분명히 서로 다를 것이다. 또 나머지 지역이라고 해도, 관동 지역의 사람들과 관서 지역 및 그보다 서쪽 지역의 사람들이 느끼는 것도 미묘하게 그러나 분명히 다를 것이다.
   그렇지만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의 핵 재난은 일본 사람들 모두를 난민으로, 그러니까 굳이 호리에 쿠니오(堀江邦夫)의 다큐멘터리 제목을 따서 부른다면, '원발 집시(原発ジプシー)'로 만들었다. 원발 집시란 원자력 발전소의 하청 회사가 고용한 뜨내기 인부를 말한다. 또, 원발 집시를 주인공으로 한 모리사키 아즈마(森崎東) 감독의 영화 "살아 있는 동안이 꽃이요 죽으면 그것까지요 당 선언(生きてるうちが花なのよ死んだらそれまでよ党宣言)"(1985)은 바로 오늘날의 이러한 일상 현실을 이미 사반세기 전에 선취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의 주류 언론은 핵 재앙이라는 파국적이고 묵시록적인 상황에서 모든 사람들이 원발 집시가 되어버렸다는 현실을 외면하고 있다. 주류 언론들은 그저 정부 및 전력회사의 공식 발표를 되풀이하는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왜냐하면, 주류 언론들조차 일본에서 흔히 '원자력촌(原子力ムラ)' 혹은 '원자력 마피아'라고 부르는 거대한 먹이 사슬 구조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일본 주류 언론의 이러한 사정은, 요미우리 신문의 사주였던 쇼우리키 마츠타로오(正力松太郎, 1885–1969)의 별명 중의 하나가 바로 '원자력 발전의 아버지(原子力発電の父)'라고 하는 사실로부터 아주 쉽게 잘 알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아사히 신문도 태평양전쟁의 종전 직후부터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을 주장했다는 점을 우리는 꼭 기억해야 한다. 후쿠시마의 핵 재앙을 불러일으킨 것이 바로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이란 터무니없는 이데올로기이다. 원자력과 인류는 양립할 수 없다는 평범한 원리를 생각해 보면 이러한 점은 금방 이해된다.
   핵 재앙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살아가야만 한다는 것을 나는 박진영의 작품 "미나미산리쿠 건물 03"에서 읽는다. 같은 곳을 찍은 연작 사진의 세 번째인 이 작품은 앞의 두 작품들에 비해서 작가가 일부러 더 칼라 토운을 밝게 처리한 것이다. 앞의 두 작품은 칼라 토운이 다소간에 밋밋하게 눌려져 있음에 반해서 이 작품은 상대적으로 더 밝고 화려한 발색(發色)으로 처리되어 있고, 전시장에서도 라이트박스 위에 붙여져 있음으로 해서 그 칼라가 더 살아난다. 재앙 뒤에도 햇빛은 아름답다. 우리는 그 빛에 의지해서 살아가야만 한다.
   핵 재앙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나는 박진영의 작품 "도쿄_트로피가 된 소년들"에서 읽는다. 올 봄 도쿄의 어린이들은 야외에서 놀지 못했다. 후쿠시마에서 200여 킬로미터 떨어진 도쿄의 어머니들이 방사능 오염을 걱정해서였던 것이다. 작가는 둥그런 석대 위에 아이들을 트로피처럼 세워두고 사진을 찍었다. 전시작 중, 작가 자신이 등장하는 작품들을 제외하고 말한다면, 유일하게 사람들이 등장하는 작품이다.
   오늘날의 이 아이들은, 예전에 한국 독자들도 감동적으로 보았던 나카자와 케이지(中沢啓治)의 만화 "맨발의 겐(はだしのゲン)"에 등장하는 바로 그 아이들이다. "맨발의 겐" 주인공 소년의 가족이 아버지의 반전 사상 때문에 '비국민(非國民)'으로 불렸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말한다면, 이제 모든 일본 아이들은 원자력발전에 대한 반대와 관련하여 잠재적으로 '비국민'이다. 사진 속 아이들의 하얀 체육복 상의에 뚜렷이 보이는 아이들의 이름, 그리고 아이들의 진한 노란 바지 색과 대조되는 땅바닥의 사쿠라 꽃잎들의 희미한 색깔이 아주 인상적이다.

4.
박진영의 이번 전시의 특징 중의 하나는 전시장 한 구석의 작고 어두운 독립된 방에서 가네코 마리(金子滿里)의 스캔된 사진들이 스크린에 투사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 방은 3.11의 재해적 상황을 관람객에게 조금이나마 직접 알려주기 위해서 그 바닥이 일부러 경사지고 굴곡지게 처리되어 있다.
   가네코 마리의 앨범은 작가 박진영이 미야기현 나토리(名取)시의 유리아게 소학교(閖上小学校)의 체육관에서 우연히 발견한 것이다. 가네코 마리의 사진들은 굳이 분류한다면, 소위 '발견된 사진(found photography)'에 속한다. 예를 들어서 한국 민중미술의 중요한 성과인 김용태의 "D.M.Z."와 비교한다면, 작가가 나름의 방식으로 적극적으로 전유하려고 하기보다는 날것으로의 발견된 사진들을 그 자체로 관람객에게 제시하려고 했다는 특징을 갖는다.
   가네코 마리의 사진에서는 한국의 옛 모습을 많이 볼 수 있다. 가네코 마리의 소학교 1학년 단체 사진에는 1958년이란 정보가 있다. 그 해는 내가 태어난 해니까, 가네코 마리는 나보다 예닐곱 살쯤 많다. 그렇지만 한국과 일본 사이의 경제력 차이 또는 살림살이의 수준 차를 감안하면, 그리고 내가, 일본에서는 태평양전쟁 종전 직후 그 명칭이 사라진 국민학교를 입학하고 졸업했다는 것을 감안하면(한국에서는 1996년에 초등학교로 바뀜), 이래저래 서로 간의 아나크로니즘이 상쇄되어 시대적 배경이 엇비슷해진다.
   소학교/국민학교 신입생이 가슴에 매달었던 콧물용 손수건이라든가 학교 운동회와 소풍 때 사진, 그리고 이러저러한 나들이 사진은 어쩌면 그리 두 나라 보통 사람들의 살림살이가 서로 비슷한가 하며 나는 여러번 감탄했다. 다다미방이 나오는 것만 빼면 그냥 한국 사진이라고 해도 다들 그런 줄 알고 넘어갈 정도다. 물론 이런 유사성은 본디 한반도가 일본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여겨진다.
   반면에 일본 사진임을 바로 알아챌 수 있는 것도 있다. 소학교 고학년 무렵 우에노공원의 사이고 다카모리 동상 옆에서 아버지와 찍은 사진이 그러하다. 가네코 마리가 2-3살 무렵에 함께 찍은 사진에서는 아버지 얼굴이 좀 더 갸름한 편인데, 우에노공원의 사진에서는 아버지 얼굴에 볼살이 더 붙었다. 우에노공원의 사진은 1960년대 초반의 동경 나들이 때였을테니 그 때에 가네코 마리는 얼마나 신나고 즐거웠까. 나도 어렸을 때 서울에 올라갈 때마다 늘 설레였던 기억이 난다.
   안타깝게도 내가 본 사진은 가네코 마리가 중학교 때쯤 찍은 것들에서 끝난다. 그 뒤 가네코 마리가 어떻게 자라고 누구에게 시집가고 또 어떤 아이들을 낳고 길렀는지, 혹은 왜 시집을 가지 않고 어떤 일을 계속해서 했는지, 그리고 가네코 마리의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남동생들은 지금 어떻게 되었는지 전혀 알 수가 없다.
   어찌 보면, 그 이상은 알 필요가 없는 건지도 모르겠다. 더 이상 파고드는 것은 다른 사람의 사생활을 엿보려는 나쁜 취미일 수도 있는 것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본디 발견된 사진의 묘미 중의 하나가 관음증을 충족시켜주는 것에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말한다면, 이러한 궁금증이 아주 못된 짓만은 아닐 것이다.
   아무튼, 그것보다 더 궁금한 게 있다. 과연 가네코 마리는, 지금 살았을까 죽었을까.
   나는 가네코 마리가 제발 살아있기를 빈다. 이런 상황에서 살아남아 있다는 것은 비록 끔찍하게 고통스러울지라도 그것 자체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내게 노스탤지어를 강력하게 불러일으키는 가네코 마리들의 사진을 보면서 새삼스레 느끼게 되는 것은 사진, 특히 작고 낡은 흑백 사진들이 아우라를 갖는다는 것이다. 기억을 매개하는 이미지로서의 사진의 힘은 바로 이런 아우라에서 나온다. 이런 노스탤지어-아우라는 두 겹으로 작용하는데, 앞서 말했듯이 하나는 개인사적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사적인 것이다. 개인사적 기억과 관련해서 한마디 덧붙이고 지나간다면, 회화와 달리 사진은 철저히 개별적이고 우연적인 것을 포착하는 기술이고 장치인 것이다. 그런 한에서만, 사진 이미지는 기억의 매개물이자 기억의 축장(蓄藏) 화폐 노릇을 할 수 있다.
   한편, 사진 이미지는 사회사적인 기억도 갖고 있다. 물론 이것은 사진 이미지를 읽는 사람이 투사해 넣고 해석해 넣어야 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아무튼, 가네코 마리는 1951년생 혹은 1952년생으로 추정된다. 1951/1952년에 일본에서 일어난 가장 중요한 사건은 일본이 미국으로부터 독립했다는 것이다. 일미 간에 먼저 평화조약이 그리고 곧 이어서 상호군사조약이 맺어지고 발효되었다.
   상호군사조약이라고는 하지만 일본은 미국의 핵우산 아래 편입되어 국가와 사회 전체는 미국에 정치적, 군사적으로 종속되게 되었다. 그 대신 일본은 군사비 지출을 줄이는 이점을 살려서 전사회적 자원과 역량을 투입하여 관료 주도 하에서 경이로운 자본주의적 발전을 이뤄낼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이 대가는 나중에 혹독한 방식으로 치루게 된다. 미국의 강요에 의한 플라자 합의(1985년)로 인해서 일본 사회는 엔고로 인한 거품 경기 국면을 맞게 되고 거품 경기 이후에는 결국 소위 '잃어버린 10년'에 돌입하게 되는 것이다.
   가네코 마리의 어린 시절은 아직 일본 사회 전체가 자본주의적 발전의 활력을 잃고 있지 않을 때였다. 가네코 마리의 사진들은 바로 그러한 일본 사회에서 동북 지역의 작은 마을에서 소학교와 중학교 학생으로 살았던 한 소녀의 성장 과정을 보여준다.
   그리고 훌쩍 건너뛰어 2011년의 3.11 재앙을 사진적 실천의 길을 통해서 추적하려던 자이니치 사진가에 의해 가네코 마리의 앨범이 발견된다. 팩트로서는 발견이지만, 상징적으로는 발굴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3.11 지진 및 쓰나미라는 지질학적 사건, 그 뒤를 이은 방사능 누출이라는 생화학적 사건, 정부와 전력 회사에 의한 진실의 은폐와 정보의 공개 지연이라는 상투적인 정치적 사건,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을 소위 복구와 부흥의 해묵은 담론으로 꿰어내면서 일본 사람들 전체를 다시 통합시키려는 낡은 내셔널리즘의 이데올로기적 사건 등이 가네코 마리의 발굴된 앨범에 복합적으로 함축되어 있는 것이다.

5.
유일한 피폭국가라고 하는 일본이, 또 이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이어서 1954년 비키니섬에서 다시 세 번째 핵 재난을 겪은 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밀도가 높은 수준의 핵 발전소들을 갖고 있다는 것, 그리고 3.11의 핵 재앙이라는 결정적인 파국 이후에도 일본 사람들 다수가 원자력 발전 문제에 관한 한 여전히 집단적 최면과 사회적 망각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이웃 나라의 사람으로서 매우 기이한 일이다.
   3.11이 일본 사람들에게 극명하게 보여준 것은 이제 더 이상 과거와 같은 방식으로는 살아갈 수 없다는 점이다. 3.11은 원자로뿐만이 아니라 메이지 유신 이래 일본 근대의 생활양식 자체를 멜트다운시켰다. 3.11은 원자력발전소뿐만이 아니라 일본의 모든 포스트모던한 것들을 블랙아웃시켰다.
9.11의 전국적 집회가 보여주듯이 적지 않은 일본 사람들은 이것을 잘 알고 있다. 그렇지만 전체로서의 일본 사회는 마치 사회적, 정치적 치매에 걸린 듯 이 문제의 역사적 뿌리를 제대로 기억하고 있지 못하다. 여전히 침묵하고 있는 대다수 일본 사람들은 1940년대 총력전 이래의 노예 근성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듯하다. 과장해서 말한다면, 내 눈에는, 일본 사람들 대다수가 방사능 누출로 불모지가 된 열도에서 노후된 원자로들과 더불어 옥쇄하려는 듯이 보인다.
   한국 유일의 애일가(愛日家)를 자처하는 내게 있어서 특히 더 안타까운 점은 가네코 마리가 그런 것처럼 이번 쓰나미의 희생자 상당수가 노인들이라는 것이다. 정부 발표에 의하면, 65세 이상의 노인들이 사망자의 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빨리 도피할 수 없었던 사회적, 생물학적 약자들이 희생된 것이다. 고베 지진 때도 사망자의 반 이상은 노인들이었는데, 그때에는 다리가 불편한 노인들일수록 낡은 목조건물의 1층에 살았기 때문에 그랬다.
   자연적이면서도 인위적인 대재앙 때 사회적, 생물학적 약자들이 주로 희생된다는 것은 동서고금을 통해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바이다. 1945년의 핵 재앙 때 일본 사람들만이 희생된 것은 결코 아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희생자들 중 열에 하나는 재일 조선인들이었다. 마루키 부부의 "원폭의 그림" 중에는 까마귀 밥이 되어버린 재일 조선인 희생자를 그린 것이 있다(참고도판 9). 또, 더 거슬러 올라가서 1923년의 관동 대지진 때 6천명이 넘는 조선인들이 무차별적으로 학살되었다. 나는 카네코 마리 사진에서 바로 그렇게 희생된 재일 조선인들의 모습을 본다. 그런 의미에서 3.11의 재앙은 일본 사람들만의 것은 아니다. 또, 실제로도 후쿠시마의 핵 사고는 바다와 공기를 통해서 이웃 나라의 사람들을 방사능 물질에 노출시키고 있는 중이기도 하다.
   3.11의 거대한 쓰나미 재해에 대해서, 그리고 후쿠시마의 핵 재앙에 대해서 일본 언론은 '미증유'라든가 '예상치 못한(想定外)'과 같은 표현을 즐겨 써왔다. 미증유의, 그리고 예상치 못한 재앙은 언제든지 올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재앙의 본질이다. 잘 해야 평균 수명 80년인 인간들이 반감기가 수만년인 방사능 물질을 컨트롤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만용이며 넌센스이다. 인류와 핵은 공존할 수도 양립할 수도 없다.
   일본은 이미 1960년대에 정보화사회론이 제출되었고, 또 몇 십년 동안 내내 기술대국을 자처해 왔다. 하지만, 쓰나미 경고를 못받았거나 받았지만 무시한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으며, 또 쓰나미에 의해서 핵 발전소는 물론이고 더 나아가서 이제 일본 사회 전체가 통제 불능의 상황에 빠졌다. 한국 역시 많은 핵 발전소를 갖고 있고, 또 앞으로도 지을 예정이다. 일본에 여러 모로 뒤쳐지는 한국은 바로 이러한 핵 재앙의 가능성과 현실성에 대해서 겸허하게 성찰하지 않으면 안된다.
   지난 한 달 동안 나는 틈이 날 때마다 박진영과 가네코 마리의 사진을 음미해 왔다. 공교롭게도 이 때 자주 들었던 노래는 대만의 노동자 노래 집단 '흑수(黑手) 나가시'가 노래하는 "노동자투쟁가(勞動者戰歌)"였다. 이 노래는 한국의 "임을 위한 행진곡"을 곡조는 그대로 두고 가사만 바꿔서 부른 것이다. 나가시(ながし, 流し)란 손님을 끌고 흥을 돋구기 위해서 연주되는 가벼운 반주 음악을 말한다. 대만의 탈식민지 문화 유산이다. '흑수(黑手) 나가시'는 이 노래의 앞은 중국어로 뒤는 한국어로 부른다.
   한중일 삼국이 뒤섞여 있는 묘한 이 노래를 들으면서 나는 3.11 때 희생된 많은 사람들을 떠올린다. 원곡인 "임을 위한 행진곡"의 경우, 노래 가사의 시적 화자는 파쇼 군대와 싸우다가 학살당한 어느 시민의 영혼이다. 특히 이 노래의 마지막 대목에서 나는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에 이루어지는 연대를 예감하면서 가볍고도 짜릿한 전율감을 느낀다: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