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면의 바다

이영준



Moving Nuclear_Japan#02, C-print, 2013


바다, 생명의 근원이자 죽음의 지대다. 시골에서 태어나서 도시에서 성장한 사람이 다시는 시골로 돌아갈 수 없듯이, 먼 옛날 원생생물 시절 바다에서 생겨난 우리는 다시 바다로 돌아갈 수 없다. 그나마 바다로 돌아가고 싶은 열망이 강한 사람이 선원이나 낚시꾼 같이 바다를 터전으로 삼는 직업을 갖는다. 그러나 바다는 냉정하고 사나운 어머니 같이, 자신에게 돌아온 자식을 품어주기는커녕 차갑게 익사시켜 버린다. 들어가 누울 수 있는 산과 달리, 바다는 사람을 품어주지 않는다. 그런 사실을 뻔히 알면서 인간은 또 바다로 돌아간다. 그리고 또 익사한다. 그렇게 인간은 바다로 귀환한다. 죽어서도 되돌아가는 그 반복강박 속에 바닷사람의 삶이 있다. 그들은 살면서 죽는다. 혹은 죽으면서 산다. 그것은 육지에서 손 끝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사는 사람들은 상상할 수 없는 축축하고 차갑고 거친 삶이다. <6시 내 고향> 같은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바다를 풍요롭고 푸근한 삶의 터전으로 그리고 있다. 하지만 그게 허위라는 사실은 대기업 잘 다니던 딸이 갑자기 고깃배를 타겠다면 주위에서 어떤 반응을 보일지 생각해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해병대를 나왔고 바다낚시를 진지한 취미로 삼는 사진가 박진영은 바다에 계속해서 이끌린다. 그에게 바다란 돌아가고 싶은 터전이자 다뤄야 할 문제다. 어머니를 사진의 소재로 삼는 사진가가 어머니에게 투정 부리면서도 사진적으로 다뤄야 하듯이, 박진영은 바다에 투정부리면서 사진으로 다루고자 애쓰고 있다. 뭐든 프레임으로 잘라서 가둬야 직성이 풀리는 사진이라는 행위에 비하면 바다라는 공간은 무한히 자유로워 보인다. 우선 바닷물에는 경계가 없다. 자유롭게 섞이는 물에 경계가 있을 리 없다. 기껏 있다고 해봐야 수온이나 염도, 물의 밀도 차에 따라 약간 구획이 되는 정도다. 그러나 바다에 떠 있는 것은 어떤 것이든 해류나 조류를 타고 둥둥 떠서 어디든 갈 수 있다. 지구를 한 바퀴 돌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런 무한대의 자유를 참을 수 없다는 듯 바다에 경계를 그어 함부로 넘는 사람을 처벌도 하고 넘어오면 전쟁을 일으키겠다고 위협도 한다. 주름 없는 공간인 바다에 주름을 그어 놓고 그걸 절대화하는 것이 인간의 습성이다. 그러나 바다는 자유가 아니다. 거대한 물이 만유인력과 바람과 합세하여 만들어내는 운동에너지는 무엇이든 파괴한다. 그 틈바구니에서 노동하거나 탐험하는 자들은 계속해서 죽어나간다. 넓은 바다가 자유로워 보이는 것은 오로지 눈속임일 뿐이다. 해수욕장에서 바닷물에 몸을 살짝 담그는 정도로 만족하지 않는다면 바다는 당신에게 파멸을 선사할 뿐이다.
   그 바다에 금을 그어 어디부터 어디까지 한국이고 일본이고 중국이고 하는 째째한 놀음에 비하면 카메라를 들고 나가서 그 주름 없는 공간을 훑는 것은 대지를 숨 쉬는 거인의 자세다. 그러나 바다에는 다시 주름이 잡히고 경계가 생기고 인간의 흔적이 남겨진다. 그 주름을 사진으로 찍을 수 있을까? 사진가는 장면을 찍지만 거기 참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는 초월적인 존재다. 박진영은 사진 찍기를 통해 눈앞에 벌어진 장면의 문제들과 고통들을 초월하려 한다. 물론 그 초월이 완전히 다른 세계로 넘어가 버리는 차원은 아니다. 사진을 통한 초월이란 사태를 다른 측면에서 보는 것이다. 결국은 되돌아가야 할 그 사태를 말이다. 왜냐면 박진영에게 바다는 어머니이자 놀이터이기 때문이다. 3.11 쓰나미와 후쿠시마 원전의 폭발은 바다에 재앙의 원천이라는 또 다른 차원을 부여했다. 사실 바다는 원래부터 재앙의 원천이었는데 두 가지 큰 사태가 그런 점을 새롭게 부각시킨 것이다. 3.11 쓰나미에는 사람들이 잘 인식하지 못하는 역사적 의미가 있다. 어차피 우리는 남의 나라에서 벌어진 큰 사건이나 재앙을 영상으로 접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영상을 만들어내는 장치가 어떤 것이냐에 따라 재앙을 인식하는 방식도 달라진다. 3.11 쓰나미는 HD로 찍힌 최초의 재앙이다. 그 덕에 우리는 바닷물이 밀려 들어와서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장면을 놀라움을 가지고 볼 수 있었다. 그것은 HD 화질에 대한 놀라움이었다. 시커먼 바닷물이 밀려오자 도망갈 곳을 찾지 못해 갈팡질팡 하던 강아지가 마침내는 그 바닷물에 집어삼켜지는 장면도 HD로 볼 수 있었다. 걸프전이 최초로 영상으로 생중계된 전쟁이었다면 3.11 쓰나미는 최초로 HD로 전달된 자연재해였다. HD로 생생하게 찍혀서 전달됐기 때문에 살아남아서 그걸 목도한 우리들은 더 미안해 진다. 손에 잡힐 듯 생생한데 해 줄 수 있는게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박진영은 쓰나미 현장에서 잔해들을 사진 찍다 사진 앨범을 하나 발견한다. 앨범의 주인공은 가네코 마리라는 여성이다. 흑백 아날로그 사진 속에는 가네코 마리가 어릴 적 시골집에서 자라는 모습에서부터 성년이 된 모습까지 일대기가 담겨져 있다. 아마도 사진을 진지한 취미로 삼았던 것 같은 아버지가 찍어준 것으로 보이는 사진 속에는 가네코 마리의 일대기가 생생하게 담겨 있다. 어리고 귀여웠던 가네코 마리에서부터 중년이 된 가네코 마리까지 다 있다. 그 앨범을 들여다 보다가 보면 가네코 마리를 잘 아는 듯한 착각이 든다. 사실 한 사람의 일대기를 사진앨범으로 훑어봤으면 잘 알게 됐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통성명만 해도 아는 사이가 되는데 사진이라는 풍부한 정보매체를 통해 보는 것은 더 잘 아는 것 아닌가. 그래서인지 박진영은 헤어진 가족을 찾듯 가네코 마리를 애타게 찾는다. (앨범의 주인공이 남자였다면 왠지 어색했을 것 같다. 남자가 남자를 찾는 것 보다 여자를 찾는 것이 왠지 더 이야기가 그럴싸해 보인다) 그는 가네코 마리를 찾으려고 광고까지 냈지만 찾을 수 없었다. 그것은 정말로 가네코 마리를 찾으려는 행위였다기 보다는 왠지 사죄하는 것 같이 보였다. 어차피 쓰나미는 인간의 잘못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에 대해 사죄할 필요는 없었고, HD 화질로 스포츠 중계를 보듯 즐긴 태도에 대해 사죄하는 듯 보였다. 그것은 오늘날 불가능한 사죄다. 어차피 영상의 추세는 핸드폰 카메라도 HD 화질로 찍을 수 있는 시대가 됐다. (S사의 스마트폰은 UHD로 찍을 수 있다) 따라서 쓰나미를 HD로 보는 것은 짧지만 긴 사진의 역사의 한 과정일 뿐이다. 그 끝에 가네코 마리가 있었을 뿐이다.
   어차피 찾으리라고 기대를 하지도 않았겠지만 설사 가네코 마리를 찾았다 해도 뭘 할 수 있었을까. 앨범을 되돌려 주는 것 이상은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살아남은 것을 축복해 줄 수 있었겠지만 이미 수많은 가족친척들과 이웃들이 희생된 이후다. 따라서 가네코 마리 찾기는 일종의 리추얼이었다. 앨범 속의 사진을 보며 어쩔 수 없이 이루어졌던 감정이입을 차단하고 체념 속에 거리를 두고자 하는 리추얼이었다. 하지만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후쿠시마가 남겨놓은 방사능이라는 또 다른 사태가 박진영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눈에 보이지 않는 방사능을 쫓아 사진 찍으러 다녔다. 쓰나미는 잔해라도 남겨놨지만 방사능은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는다. 우리에게 전해지는 것은 후쿠시마 앞 바다의 방사능 수치가 몇 베크랠이라더라 하는 추상적인 수치 정도였을 뿐이다. 방사능은 포토제닉한 대상이 아니었기에 사진 찍기가 애초부터 불가능하다. 박진영이 볼 수 있었던 것은 방사능이라는 사태의 결과로 빚어진 텅 빈 풍경 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이 대피하고 난 인적 없는 길거리들을 사진 찍었다. 사람들이 살며 구획을 짓고 구조물을 세워서 주름 진 공간이 됐던 도시는 쓰나미로 말미암아 다시 바다 같이 주름 없는 공간이 돼버렸다. 분명히 길거리인데 아무도 살지 않으므로 더 이상 길거리가 아닌 그 기이한 상태가 사진 속에 나타나 있다. 주름인데 주름이 아닌 그 상태 말이다. 그래서 도시는 다시 바다 같이 평평한 공간이 됐다.
   도시의 주름 속에 있는 여백을 찍는 것은 박진영의 오래 된 습관이다. 그는 도시라는 바다 속에서 주름들을 사진 찍었었다. 그 주름을 통해 도시에는 옷처럼 소매와 깃이 생기고 유연한 조직이 생기고 스타일이 생긴다. 도시의 주름 속에서 사람이 하는 역할은 무엇인가? 도시는 의미와 기능으로 조밀하지만 사실 그 사이사이 여백이 많은 공간이다. 사람들은 일 하거나 약속을 위해 뛰어가거나 쉬거나 먹는 기본적인 기능에 75%의 시간을 부여한다면 나머지는 멍하니 생각하거나 가야 할 방향의 반대로 가거나 하품을 하거나 하는 의미 없는 일들이다. 박진영이 노리는 것이 바로 그 여백이다. 여백이야말로 우리들의 생활공간이기 때문이다. 그는 그 여백을 엿본다. 어떤 장소에 갔다가 박진영이 사진 찍는 모습을 우연히 볼 기회가 있었는데, 그는 정말로 엿보는 사람처럼 자세를 낮추고 도둑질 하듯이 카메라를 들이밀고 있었다. 그래서 그가 잡아낸 것은 기능과 의미의 직조 사이에 난 구멍이다. 아무리 바쁜 사람이라도 하품할 시간은 있고, 긴박한 전쟁 중에도 잠시 담배를 피울 시간은 있듯이, 그런 구멍은 사실은 삶의 본질이다.
   여백이 본질이 되고 본질이 여백이 되는 희한한 전도현상을 잘 보여주는 것은 더글라스 고든과 필립 파레노가 축구선수 지단을 주인공이자 소재로 만든 영화 <Zidane: A 21st Century Portrait>이다. 여기서 지단은 경기 내내 하는 일이 거의 없어 보인다. 경기의 양상은 어쨌든 오로지 지단만 쫓아다니는 그 영화는 마치 사람의 행동을 분석하듯이 그가 90분 내내 뭘 하는지 보여준다. ‘90분 내내 지치지 않고 야생마처럼 뛰는 축구선수‘라는 선입견과는 달리, 지단은 대부분의 시간을 걸어 다니거나 서 있거나 침을 뱉거나 욕을 하고 있다. 여백이 참 많은 것이다. 지단은 그런 행위들 중간중간 슛을 날리거나 패스를 한다. 슬슬 걷는 시간이 많으니까 슛이나 패스 같은 본질적인 행위들이 여백처럼 보일 정도다. 축구선수란 패스를 하거나 슛을 날리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이 영화에 나오는 축구선수는 많은 시간을 쓸데 없는 행위에 보내고 있다. 그런데 그 시간에도 그는 노는 것이 아니라 축구를 생각하고 있을 것이며, 슛이나 패스를 염두에 두고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슬슬 걷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슬슬 걷거나 침 뱉고 욕 하는 시간도 축구의 일부다. 그것은 마치 공책의 여백도 공책의 일부인 것과 같다. 결국 이 영화에서 축구의 여백과 본질의 구별은 별 의미가 없어 보인다. 박진영이 엿보려 하는 것도 사실은 여백 자체가 아니라 어떤 것이 본질이고 어떤 것이 여백인지 구분하기 힘든 도시공간의 중층성이다.
   그런데 박진영이 노리는 도시의 여백은 그런 것 만은 아니다. 그는 기존의 도시에 자신의 여백을 얹는다. 현실의 모든 순간에는 4차원으로 가는 작은 틈들이 있다. 그 틈 사이로 합리성이 빠져 나가면 사고가 나고 스케줄이 빠져 나가면 갑자기 여유 있는 시간이 되고 시각이 빠져 나가면 사진작품이 된다. 그는 도시의 4차원적 순간을 노린다. 공간과 사물과 사람이 얼어붙은 듯 모든 의미가 어떤 작은 구멍으로 빨려 나가버리는 듯한 순간을 노린다. 도시는 메시지와 기호들이 가득 차서 개인이 숨 쉴 공간이 별로 없어 보이지만 눈썰미가 있는 사진가에게는 틈들이 보인다. 카메라는 틈을 찾는 수단이다. 그러나 카메라라고 널널한 기계는 아니다. 프레임과 노출, 앵글과 셔터 찬스 등 수많은 규칙들이 사진을 빡빡이 메우고 있어서 그런 규칙들을 따르다 보면 왠만한 사진가의 사진은 그런 규칙들의 시각화로 끝나고 만다. 작가라면 모름지기 거기서 틈을 발견해야 한다. 박진영은 도시의 틈에다 사진의 틈, 그리고 자신의 지각과 인식의 틈을 겹쳐 여러 겹의 틈들을 찾아낸다. 그의 카메라는 틈의 기계로 바뀐다. 그래서 그가 카메라만 들고 나가면 평소에 점잖던 사람도 이상한 표정을 지어주고, 수직으로 잘 서 있던 건물이 기울어지고, 뛰어다니던 개가 갑자기 멈춘다.
   사진이 노리는 궁극의 틈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만드는 것이다. 과학사진이라면 안 보이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적외선이나 자외선 혹은 열영상을 쓸 테지만 박진영이 다루고 있는 사진의 문제는 가시광선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그런데 방사능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어디 있는지 모르는 가네코 마리도 보이지 않는다. 쓰나미가 남기고 간 수많은 잔해의 주인들도 보이지 않는다. 아마 그것들이 눈에 보이게 될 때 쯤이면 그 모습이란 별로 아름답지 않을 것이다. 방사능은 피폭자의 후손들에게 기형의 신체를 남겨 놓을 것이고 쓰나미 잔해의 주인들은 주검으로 나타날 것이다. 어떤 사진가들은 그런 것 조차 사진작업의 소재로 삼아 걸작을 남겼지만 그런 것을 가시성의 영역에 노출시키는 것이 꼭 바람직한 일인지는 모르겠다. 사실 사진은 너무 많은 것을 보여주는 지도 모른다. 대상의 디테일을 남김 없이 보여주는 사진은 보아야 할 것과 볼 필요 없는 것, 안 보는 것이 나을 것 사이의 경계를 일찌감치 뛰어넘어 버렸다.
   그래서 박진영은 여러 층위의 비가시성과 싸운다. 가시성과 비가시성의 경계는 윤리적인 경계와 겹치기도 하고 감각적인 경계와 겹치기도 한다. 3.11 쓰나미 직후 현장을 찾은 그는 너무나 처참한 광경에 카메라를 들이댈 수 없었다고 했다. 일단 마음의 경계가 쳐진 것이다. 그 다음은 어떤 식으로 사진을 찍을까 하는 사진의 경계가 작용한다. 만일 보도사진가라면 그런 경계를 마구 뛰어넘어 희생자의 얼굴에까지 카메라를 들이대어 사진을 만들고 말 것이다. 사실 서울에서 사진 찍을 때 박진영은 그런 식으로 작업했다. 폭력배건 윤락여성이건 그는 사람들의 파사드라 할 수 있는 얼굴에 카메라를 들이대어 그들의 민낯을 드러냈다. 그러나 쓰나미의 현장에서는 그럴 수 없었다. 그래서 쓰나미 잔해의 사진들은 매우 신중한 접근의 결과고,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잡아내야 하는 사냥의 결과가 아니라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사진 찍을까 하는 심각한 고민의 결과다. 그때 찍은 사진들을 보면 찍으려다 망설이고 고민하고 뜸을 한참 들인 흔적이 보인다. 우리가 보는 것은 쓰나미의 현장이 아니라 그 머뭇거림의 시간이다. 그 사진들은 천천히 고민하면서 찍은 것이다. 결코 아름다운 스펙터클로 소비해 버릴 수 없는 사진들이다. 그 사진들로 인해 짧은 시간의 소비와 긴 호흡 속의 성찰 사이에 경계가 그어졌다.
   그런데 박진영의 사진은 그 경계의 중심에 서 있지 않다. 그는 항상 주변부에 관심 있다. ‘주변성’은 1991년과 2014년을 연결시켜 주는 힘이다. 그 힘 덕분에 1991년 서울의 길거리와 2014년의 인적 없는 후쿠시마의 길거리는 연결되고 있다. 1991년에 했던 <386세대> 시리즈의 백미는 시위현장에 나타난 조폭이다. 전투경찰들 틈에서 베이지색 배바지를 입고 허리에 삐삐를 찬 조폭이 이 쪽을 노려보고 있는데, 살기는 느껴지지만 그가 서방파건 태촌파건 상관 없이 이 사진 속 사태의 주인공은 아니다. 시위대와 전투경찰이 주인공인 시위현장에서 조폭의 존재는 어디에도 끼워넣을 수 없는 주변적인 위상을 가질 뿐이다. 그는 그런 사실이 불만스러웠는지 사진을 찍는 박진영을 노려보고 있다. 그런 사실이 불만스러워서 설사 사시미칼을 꺼내 휘둘러도 그는 여전히 이 사진에서는 주변적이다. 그런 행위는 시위에 걸맞지 않기 때문이다. 거기가 고려대학생들이 정치깡패들에게 피습 당한 1960년 4.19 당시 밤의 청계천이라면 몰라도 말이다. 그래서 이 사진은 기묘한 주변성에 처해 있다. 이 시리즈에서 묘사하고 있는 시위장면이 다 그렇다.
   2004-2005년에 했던 <도시의 소년> 시리즈는 도시의 주변에 있는 주변적인 소년들에 대한 얘기다. 그 중 ‘변두리의 여름방학‘이 주인공처럼 보이는 이유는 그 사진이 철저히 주변적인 풍경이기 때문이다. 사진에 나오는 하천은 물이 맑지도 않고 팔뚝 만한 잉어가 노는 것도 아니고, 청계천 같이 관광객이 오는 것도 아닌, 마치 중랑천 같은 변두리 하천이다. 그런 하천가에 변두리 같이 생긴 소년 둘이 변두리 같은 장난을 치다 사진의 순간 속에 얼어붙어 있다. 마침 소년들은 사진의 프레임에서 왼쪽으로 치우쳐 있으므로 사진의 주인공 조차 돼지 못하고 있다. 이 소년들은 역사의 주인공도 아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주인공이 될 수 없을 것 같은 소년들은 이 시리즈에서 반복해서 나타난다. ’부상 당한 미드필더‘는 더 이상 뛸 수가 없어서 그라운드에서 밀려나 사이드라인 바깥에 외롭게 서 있다. 그는 날개를 다친 새 마냥 쓸쓸하다. ’맨땅에서의 평가전‘은 거친 흙바닥이 한국이 국제 축구의 변두리임을 말 해주고 있다. 주변화가 숙명인 양, 박진영은 항상 주변화된 모습을 좇고 있다.
   2011년 3.11 쓰나미의 중심이 되는 이미지는 광폭한 바닷물이 마을과 도시를 휩쓰는 HD 영상이다. 이 영상에서 바닷물은 모든 것을 초현실적으로 망가뜨려 변형시키며 재해와 풍경의 폭력적인 중심이 되고 있다. 그에 비하면 박진영이 사진 찍은 잔해들은 쓰나미의 주변이다. 쓰나미의 시간이 남겨놓은 잔존물이다. 그 잔존물이 <386 세대> 시리즈에서 쓸데없이 시위현장을 배회 하는 구경꾼들이고 <도시의 소년> 시리즈의 소년들이다. 2014년이 되면 사진은 더 주변적인 것을 좇는다. 사람들이 다 떠나고 텅 빈 후쿠시마의 시골마을은 주변적이라고 할 수 조차 없는 곳이다. 주변적이라고 할 때는 어느 정도 중심과 연관이 있음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그러나 후쿠시마의 마을은 방사능으로 오염되어 인간이 들어가서는 안 되는 격리지역이 됐다. 체르노빌 원전 주변의 프리피아트가 완전히 고립된 재난지역이 되어 인간세계로부터 격리된 블랙홀이 돼 버렸듯이, 후쿠시마의 마을도 그렇게 주변으로부터 한 번 더 주변화 돼 버렸다. 따라서 20년 이상 주변적인 것에 이끌려온 박진영이 그곳에 이끌리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제는 주변적인 것이 그의 사진의 중심이 돼버렸다. 물론 주변적인 것을 찍어서 유명해진 사진가들도 많다. 세바스챠웅 사우가두는 전세계의 처참하게 열악한 노동현장과 난민들을 찍어서 돈도 많이 번 스타 사진가가 됐다. 어빙 펜은 길에 버려진 담배꽁초와 깡통을 크게 확대해 찍어서 훌륭한 예술사진 작품을 만들었다. 이들과 박진영 사이에는 큰 심연이 놓여 있는데, 박진영은 자신이 사진 찍은 주변적인 것을 이용하여 출세할 생각이 없다. 박진영 자신이 항상 경계 위에 살아 왔다. 다큐멘터리와 예술 사이의 경계에 있으며, 그의 몸은 항상 일본과 한국 사이 어딘가에 있다.
   해양경찰의 순시선을 타고 동남아를 항해하며 찍은 시리즈인 ‘두면의 바다’는 그 자신과 사진의 처지를 잘 말해주는 제목이다. 이 사진들에서 바깥세계로 통하는 둥근 창은 배를 정박할 때 밧줄을 내리고 올리는 구멍이다. 밧줄은 배와 항구를 잇는 일종의 탯줄 같은 존재다. 사람이 쓰는 창으로는 메시지를 주고 받을 수 있지만 밧줄용 창으로는 밧줄만 오갈 뿐이다. 여기서 소통이라면 배가 정박하기 위해 밧줄을 내리고 올린다는 단순한 기능만 있을 뿐이다. 박진영은 그 답답한 창을 통해 세계를 보고 있다. 그런데 거기서 보이는 세계 또한 주변적이다. 동남아 어딘가의 항구에 정박한 배들은 요즘 해상운송의 주인공인 대형 컨테이너선이 아니라 가까운 항구 사이를 연결하는 작은 피더(feeder)선들이다. 항구도 샹하이나 싱가폴, 션전 같은 세계적인 큰 항구가 아니라 이름 모를 작은 항구들인 것 같다. 그리고 쌓여 있는 컨테이너들도 머스크나 MSC, CMA CGM 같은 큰 해운회사가 아닌 주변적인 회사들 것이다. 도대체 중심이고 주변이고 구별이 없을 것 같은 넓은 바다에도 주변이 있다니 얼마나 아이러니 한가. 그러나 역사는 바다에도 중심과 주변의 구별을 만들어 놓았다. 아시아에서 바다의 중심은 단연코 말라카 해협과 홍콩, 샹하이 등 큰 배들의 왕래가 잦고 옛날부터 열강들이 각축해온 곳들이다. ‘두 면의 바다’에 나오는 곳은 종로나 청계천이 아니라 부천 쯤 되는 곳들이다. 그는 밧줄 내리는 그 창을 통해 바다에서도 4차원으로 통하는 틈을 찾고 있다.
   박진영은 바다로 돌아갔지만 중심이 될 수는 없었다. 그가 쓰나미가 될 수는 없었기에. 하지만 그는 사람들의 시선이 중심을 좇을 때 놓치는 주변을 끝까지 물고 늘어진 끝에 시간이 만들어놓은 미세한 차이들을 감지해 낼 수 있었다. 그것은 쓰나미의 시간과 지금 우리가 살아서 이 글을 읽고 있는 시간 사이의 차이다. 작아 보이는 그 갭 속에 많은 차이들이 들어 있다. 그것은 살아남은 자와 죽은 자 사이의 차이이기도 하고, 사진으로 찍힌 것과 찍히지 않은 것, 혹은 보고도 찍을 수 없는 것 사이의 차이이기도 하다. 박진영에게는 모든 곳들이 바다다. 항상 물결이 치며 고정된 모든 것을 부유시키고 중심과 주변의 구별을 해소시키는 바다 말이다. 한국에서 사진은 어쩐지 경직돼 있고 촌스럽고 재미 없는 장르다. 박진영의 사진이 바다가 되어 그 재미 없는 사진을 녹이고 부유시키면 좋겠다.


사진집 <두면의 바다>, IANN, 2015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