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세계에서 다큐멘터리 사진의 길

최연하




대부분 사회를 향해서 급류를 이루던 박진영의 사진이 고고학자가 발굴해 낸 유물을 촬영한 사진처럼, 시․공이 굳은 침묵의 이미지로 변화했다. 최근 국립현대미술관에 걸린 그의 작품에서는 어떠한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그런데 내겐 그의 사진이 시끄럽고 아프다. 십 수 년 전 학창시절 수업시간에 처음 봤던 박진영의 사진들은 동기들보다 세련되었고, 집요한데다 새로웠다. 기억 속에 그는 사진을 찍기 위해 소형 오토바이로 서울 곳곳을 침투하였다. 다큐멘터리 사진가로서 세밀하고 민첩하게 대상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오토바이만큼의 존재감이 필요했을 것이다. 동기들의 속도보다 늘 앞서가더니 결국 학교의 울타리를 박차고 나가 줄기차게 발표한 작품들이 <서울, 간격의 사회Seoul, Society of Gap>(2004), <아르바이트 Part-Time Job>(2004), <도시 소년 Boys in the City>(2005), <더 게임 The Game>(2006) 이다. 그리고 홀연히 국경을 넘어버렸다. 이국(異國)에서 얻은 사진을 향한 치열한 성찰의 기록들은 이후의 그의 작업노트에서 자주 확인된다. ‘어깨에 힘을 빼’고 ‘사진적인 사진’을 찾아, 되도록 많이 관찰하고 천천히 다가가서 촬영하고 발견하기. 어느덧 그는 사진가에서 관찰하고 수집하고 분석하는 사진 찍는 인류학자로 변모하고 있었다. 예의 변함없는 세련됨과 새로움 속에서 고요하게 정지 된 사진이미지의 밀도는 서서히 박진영스타일로 다져지는 것 같다. 국경을 넘는 댄디한 사나이에 의해 발굴된 후쿠시마의 기억들과 동경의 풍경들은 1960년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를 촬영한 ‘토마츠 쇼메이’와 보스니아,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등 세계의 분쟁지역을 찍은 ‘사이몬 노포크’의 사진과 겹쳐진다. 아포칼립스의 현장이 기계적인 사진이미지로 보존되거나 죽음과도 같은 이마고로 박제되어버린 것이다. 한 장의 사진으로 보존/말소되거나 동시에 역사를 인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양극에 간직한 채.

대형카메라와 파노라마카메라, 오로지 슬라이드 필름으로만 촬영해 온 박진영은 대상-세계를 향한 몰입을 위해서라도 디지털로의 변환을 거부한다. ‘사진의 길’은 대상과 만나는 사진가의 자세에서 비로소 시작되기 때문일 것이다. 애초부터 다큐멘터리 사진은 과거의 기록에 멈추지 않고, 현재와 미래로의 매개에 있었다. 사진 매체의 특성이 발휘되는 지점도 그 ‘매개성’이다. 박진영이 자신의 프로세스를 고집하는 이유도 시각이미지의 창조적 반복을 위함이다. ‘진부한 반복이 아니라, 창조적 반복’. 사진가가 대상을 만나 셔터를 누르는 기계적인 동작은 사진가 스스로 자가당착에 이르게 하기도 하지만, 그 사이에서의 차이를 발견하며 새로운 이미지 장場으로 건너가는 열림의 지각을 형성하기도 한다. 이렇듯 언제나 양립한 딜레마를 안고 있기에, 사진가는 특히 자신이 소유한 카메라가 프로그래밍한 시스템 속에서 ‘고유하게’ 자유로워져야 한다는 것이다. 과거의 사건에 대한 일반적인(기계적인) 기록이 현재에 대해 어떠한 잠재성(가능성)으로 기능할지, 다큐멘터리 사진가의 반복적 셔터누름에서 차이를 기입하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박진영의 사진을 보며 생각하게 된다.

그동안 다큐멘터리 사진에 대한 많은 논의들은 그것의 정의를 찾기 위한 모색들에 그쳤던 것 같다. 정의 내리기에 앞서, ‘지금 사진은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라는 존재론적인 물음이 필요한 때이다. 이 질문은 ‘사진은 무엇인가’라는 철학적, 논리적 정의를 요구하는 물음과는 다른 답을 찾게 한다. 후자의 질문이 대개 ‘사진은 00이다’로 정의 된다면 전자는 ‘무엇을 보고 있는가’, ‘이 사진에서 무엇이 발생하고 있는가’처럼 결론 지워질 수 없는 사유의 장을 개시해준다. 사진의 메시지는 촬영자의 몫보다 관객의 자리에서 더 무거워진다. 사진이 메시지를 전달한다면 그것을 읽어내는 행위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베냐민은「역사의 개념에 대하여」에서 과거에 대한 인식을 ‘위험한 순간에 섬광처럼 스치는 어떤 기억을 붙잡는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지나간 어떤 시대를 추체험하고자 한다면 이후 역사의 진행에 관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머리에서 떨쳐버려야 할 거라고’ 제안한다. ‘과거의 진정한 상像은 쏜살같이 지나가버린다. 우리는 그것이 인식되는 찰나에 영원히 되돌아올 수 없이 다시 사라져버리는, 마치 섬광처럼 스쳐 지나가는 상으로만 과거를 붙잡을 수 있을 뿐이다. 우리에게 이해관계가 있는 현재에 인식되지 않은 모든 과거 이미지는, 사라져서 다시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위협한다.’는 베냐민의 말대로, ‘결을 거슬러 역사를 솔질하는 것을 자신의 과제’이자 자세로 동시대 다큐멘터리 사진가들은 취해야 하지 않을까. 그것은 사진가의 윤리이자, 사진이미지를 보는 사람의 윤리이기도 하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보이는 것만 보는 현대의 시각우위의 주체들에게 여전히 유효한 베냐민의 말은 진정할 수 없는 이 시대에 진정한 울림을 주고 있다. ‘진정한 과거’란 우리가 인식하지 못한다면 언제든지 사라져 버릴 수 있기에. 그런 의미에서 다큐멘터리 사진의 가치는 실재를 기계적이고 합리적으로 옮겨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사건을 통해 현재와 미래의 시간을 각성해낼 수 있도록 예인 하는 데에 있다.

‘정지는 죽음이다.’라고 한 폴 비릴리오(P.Virilio)의 말과 선명하게 중첩되는 박진영의 사진, <2011년 1월 1일 도쿄>는 신년을 맞이한 동경 시민들이 어딘가로 향하고 있는 장면을 보여준다. 군중은 물결처럼 지나가면서 사라지고 있다. 새해를 축하하는 이 도시의 시민들은 곧 그들에게 다가 올 ‘3.11’을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다. 이 사진은 ‘3.11’전에 찍힌 사진이지만, ‘3.11’이후의 일본정국을 한 장으로 강력하게 묘파하고 있다. 3.11지진 및 쓰나미라는 사건과 그 뒤를 이은 핵 재앙이라는 파국에 대해 일본 당국과 주류언론이 은폐/외면하거나 해묵은 담론으로만 뒤덮으려 한 지 4년이 흐른 뒤, 다시 보는 이 사진은 앞으로 닥칠 재앙에 대해 국민을 전체로 통합하려는 국가주의에 대항한 시민들의 행렬로 보인다. 아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에 힘없이 종속될 수밖에 없는 나약한 행인의 무리로도 보인다. 또는, “이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이어서 1954년 비키니섬에서 다시 세 번째 핵 재난을 겪은 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밀도가 높은 수준의 핵발전소들을 갖고 있었다는 것, 그리고 3.11의 핵 재앙이라는 결정적인 파국 이후에도 일본 사람들 다수가 원자력 발전 문제에 관한 한 여전히 집단적 최면과 사회적 망각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박진영, <Way of Photography>, 도록에서 이재현의 글, p. 124.)을 입증하는 매우 기이한 장면이기도 하다. 사건으로서의 사진, 직선적으로 흐르는 시간을 중지시키는 사진의 새로운 모험은 과연! 가능하다. 비릴리오가 말한 것처럼 ‘대중들은 주민도, 사회도 아니다. 행인의 무리일 뿐이다. 혁명의 분견대는(공장이라는)생산의 장소가 아니라 거리에서 가장 이상적인 형태를 취한다. 인위적인 기계의 톱니바퀴가 되기를 잠시 멈춘 채 스스로 일종의 동력기(공격 기계), 즉 속도의 발생장치가 되는 때에’(이재원역, 『속도와 정치』, 그린비, 2005, p.49.) 거리로 쏟아져 나온 시민들이 찍힌 이 사진 한 장은 죽은 시간과 사라진 것들을 복구하려는 다큐멘터리 사진의 사건성과 새로운 시간성을 보여준다. 이미지화 된 세계에 사진이 균열을 낼 수 있다면 이러한 방식이 되지 않을까.

다시 질문을 되뇌어 본다. 지금 우리 사진은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사진을 생산하고 향유하는 사람들이 지금처럼 풍요로운 적은 없었다. 많이 보고, 계속 찍고, 늘 보여주는 것이 삶의 한 부분이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미지-세계에서 비명을 지르고 허우적거리지만 회의보다는 안주를 택한다. ‘이-미지’의 세계에서 볼 수 없고 알 수 없었던 ‘미지’의 세계는 덮어두는 것이 편리하기에 보편이 이끄는 직선적인 역사관은 이미지대중의 도피처이기도 했다. 사는데 별 지장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반면 사진이미지를 적극적으로 생산해내는 사진가들의 움직임은 어떠한가. 소위 ‘다큐작가’들의 활발한 문제제기들이 지금처럼 강력했던 때도 없었던 것 같다. 다양해진 작가층과 함께 이전에 없었던 소재와 주제들이 곳곳에서 발표되고 있다. ‘밀양, 강정, 강, 세월, 쌍용…’의 현장을 보여주었고, 고령화 시대의 노인의 문제, 부르주아 자본주의에서 치명적인 가난의 현실을 알게 했다. 위기로 치닫는 소비와 물신주의가 날것으로 드러나 보는 것을 멈추게 할 때도 있다. 많은 다큐작가들의 놀라운 행보들은 이미지현실에 균열을 내기에 충분했다. 그런데 일반의 사진 수용자와의 간격은 더욱 멀어지고 있다. 이미지대중은 이미지 스크린에 반영된 가상의 세계가 오히려 현실에 가깝다. 현실보다 더 사실적인, 현실의 결핍을 환상으로 포장할 수 있는 보다 현실 같은 이미지에 익숙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다큐멘터리 사진의 ‘힘’은 어디에서 나올까. 오직 사진가의 잘 찍은 사진이 발원지일까. 아니면 또 다른 환상을 제공할 더욱 강력한 사진이 필요한 것일까. 여전히 몇몇의 작가와 사상가 혹은 성직자의 아우라는 중요하다. 그렇지만 더욱 요원한 것은 사진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읽어내는 보다 성숙한 이미지 생태계의 조성이다. 서울역의 노숙자가 추위에 떨고 있는 모습이 찍힌 사진 앞에서, 밀양의 할머니들의 절규 속에서,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들의 눈물에서 그것이 과연 우리와 전혀 상관없는 일이 아니라, 어떤 식으로든 우리와 연결되어 있음을 놓치지 않는 것. 동시대, 한 하늘아래 산다는 것은 어쩌면 자본과 권력이라는 거대한 괴물이 선점해버린 이미지-세계의 모순을 떠안는 일에 다름 아니다. 동시대라는 자장은 그렇게 마련된다. 타인의 고통을 바라보는 부끄럽고 안타까운 마음과 함께 이미지 뒤의 현실을 바라보는 것이 보는 자와 찍는 자의 기본적인 윤리가 아닐까. 그때 비로소 ‘사건’으로서의 사진이 가능할 것이다. 공동체와 동시대성의 (불)가능한 지점을 위해 중단 없이 노력하는 열정이 사진가의 윤리이고, 본다는 것의 불가능속에서 가능성을 꿈꾸며 벙어리 대화를 멈추지 않는 것이 사진보기의 윤리이기 때문이다. 박진영이 선실 안에서 촬영한 침묵하는 바다 이미지를 통해 서서히 방사능에 노출중인 위기 촉발의 상황을 담담하게 배열해 낸 이유를 알겠다. 이 적막감으로 가득 찬 텅 빈 바다가 삼면을 에워싸고 있는 곳이 바로 한반도이다.


* 이 글은 중대신문(2014년 12월 3일자)에 실린 필자의 원고를 바탕으로 다시 정리된 원고임을 명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