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기: 기록의 여정
문영민 (작가, 미술비평, 메사추세츠 주립대 교수)
고은사진미술관 본관에서 열리는 박진영의 사진전 <<방랑기>>는 지난 20여년간의 주요 작업인 <386세대>, <서울.. 간격의 사회> <아르바이트>, <도시소년>, <더 게임>, <히다마리> , <새마을운동>, <사진의 길>, 그리고 최근 <방랑기> 연작까지 총 망라되어, 40대를 들어서는 작가의 중간회고전이다. 그의 작업은 도큐멘타리 사진의 한계와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일련의 실험으로서 사진의 근원적 문제로 다가가는 기록의 여정으로 볼 수 있다.
작업 초기에 박진영은 군부정권의 몰락 이후 변모하는 한국 사회의 모습을 담아냈다. <386세대>는 학생운동, 노동운동, 거리의 시위 등 시민사회의 투쟁 속의 진통의 순간들을 담아냈으며, <서울에서 버티기>는 사회의 노동계층의 고단한 일상과 국익을 위해 희생된 서민들의 현실을 포착하고 있다.
컬러사진을 이용한 <아르바이트> 이후에는 심화되어 가는 신자유주의의 폭력성과 그 구조 안에서 착취당하는 이들을 다루었는데, 특기할 점은 작가가 그들의 이름과 일일 임금을 제목 속에서 밝히고 있다는 점이다. 사회문제를 심층적으로 다루는 이 연작에서 박진영은 피사체를 극적으로 프레이밍하기 보다는, 처음으로 전방위적 시야를 보여주는 파노라마 형식을 도입하고 있다. 도큐멘타리 사진이 취하는 객관성이라는 신화 또는 허구성이 명백하게 드러남과 함께 취약해진 도큐멘타리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의지를 보인다.
역시 파노라마 형식을 취하는 <도시소년> 연작에서는 상이한 이미지를 두 장씩 병치함으로써 내러티브를 구축하는 등 사회적 도큐멘타리의 확장을 시도한다. 이 작업들은 꿈꾸는 청소년들과 그들이 처한 열악한 현실, 그리고 그들이 이겨내기에는 너무나 버거운, 가시적이거나 비가시적인 거대한 사회적 구조들과 물리적, 경제적 여건들에 둘러싸인 연약한 청소년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지속되는 냉전의 후속 여파를 파헤치는 <더 게임> 연작에서 박진영은 처음으로 대형카메라를 사용하는데, 저널리즘적 도큐멘타리를 2미터 가량의 대형 화면으로 보여주는 담대한 시도를 보였다. 냉전 구도하에 민주정부 수립 이후 와해된 신화, 예를 들면 진위 논란 이후 잡초와 쓰레기 더미와 더불어 방치된 이승복 동상, 불안하게 부유하는 새터민 청소년들, 불발탄들이 꽂힌 매향리의 미사일폭격 현장 등의 묵시록적인 이미지들이 포함된다.
일본으로 옮겨간 뒤 박진영은 사진 본연의 요소와 기본조건들에 천착한다. <히다마리> 연작은 약간의 빛만 있으면 사진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시도로써, 현재 난무하는 이미지의 디지털 조작 없이 빛과 공간과 시간을 이용하여, 가장 직접적이며 고전적인 방법으로 최대한 아름다운 이미지를 만들어내고자 하는 소박한 욕구의 실천이다.
2011년 3월 동부 일본의 대지진을 맞아 박진영은 뉴스미디아의 경쟁적인 보도를 위한 저널리즘적인 사진가들의 무리에 합류하지 않고, 거리를 둔채 쓰나미가 지난 이후의 흔적들을 엄정하게 기록한다. <사진의 길>은 이러한 기록의 모습과 더불어 재해현장에서 작가 개인적인 개입을 시도했다. 예를 들면 자신이 나무에 걸어놓은 마이클 잭슨의 이미지, 찍다 죽을 뻔한 사진, 폐허에서 나뒹구는 유품들을 배열한 사진 등이 그것이다. 요컨데 그는 현실로부터 거리를 두고 기록하려는 의지와, 이와 상반되듯이 보일 수 있으나, 현실에 자신의 의지를 개입하려는 두 가지 영역에서 동시에 작업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의 <방랑기> 연작은 동일본 대지진 이후 후쿠시마와 미야기현에서 습득한 사물들과 토쿄의 벼룩시장, 고물상 등에서 구한 것들도 포함한다. 그가 선택한 사물들의 공통점은 쓰나미라는 혹독한 시련을 견디어 내고 잔존한 것, 버려졌음에도 불구하고 선택받은 것들, 낡았지만 버려지지 않고 계속 사용되는 것들에 대한 존재론적 성찰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물체에 대한 연민은 곧 기능을 상실한 육체 또는 죽음과, 그것의 기억에 대한 은유이며, 두고 가는 육체를 인식하는 작가 자신의 정신적 방랑기의 기록이기도 한 것이다.
전시제목인 <<방랑기>>는 그의 고향인 부산에서 지난 20여년의 사진가로서의 한국, 일본, 베트남 등 여러 곳의 여정을 돌아본다는 의미에서 볼 수도 있겠으나, 오히려 그의 작업은 균형잡기라는 그의 꾸준한 노력으로도 볼 수 있다. 움직이는 수단인 자전거나 목마와 같은 물체를 의인화한 듯한 <<방랑기>>는 센티멘탈한 느낌을 줄 수도 있으리라. 하나 그 이면에는 사진이란 무엇인가, 기록한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철학적, 근원적 질문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한 그의 물리적 이동, 정신적 부유, 그리고 형식적 실험에 대한 은유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박진영의 도큐멘타리는 액션의 현장에서 ‘결정적 순간’을 취하는 ‘뜨거운’ 도큐멘타리 사진으로부터, 사건 이후에 시간과 거리를 두고 엄정하고 ‘차갑게’ 관조하는 방식으로 전이해왔다. 박진영의 도큐멘타리의 실천은 애초에는 사건 즉시의 현장의 증거물로서 기능하다가, 차츰 역사적 순간과 미적 순간이 결합된 형식으로 전이했다. 한편 <히다마리>, <사진의 길>에서의 개입, 그리고 <방랑기> 연작에서는 시간의 흐름을 기본으로 하는 역사적 인식을 전제로 하지만, 특정한 역사적 의미를 거부하는 일종의 비역사적 순간들을 만들어내는 것으로 보인다. 즉, 그는 이러한 세가지 경향의 도큐멘타리 방식을 경유하고 있는 듯 하다. 이러한 면에서 그의 작업은 도큐멘타리의 가능성 탐지와 모순 사이에서의 균형잡기의 일환이며, 이동과 여정의 기록인만큼 기록의 여정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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