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y of Photograp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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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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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여름에 내린 눈, Light jet print, 2010
자전거, Light jet print, 2013
목마, Light jet print, 2013
도쿄_트로피가 된 소년들(0.8m), Light jet print, 2011
이시노마키시_동상(13.8m), Light jet print, 2011
미나미산리쿠_건물01(12.3m), Light jet print, 2011
미나미산리쿠_건물02(12.3m), Light jet print, 2011
나토리시_란도셀(14.7m), Light jet print, 2011
나토리시_야구 글러브(14.7m), Light jet print, 2011
나토리시_사진액자(14.7m), Light jet print, 2011
나토리시_카메라들(14.7m), Light jet print, 2011
나토리시_음료수병(14.7m), Light jet print, 2011
나토리시_비너스(14.7m), Light jet print, 2011
나토리시_정(14.7m), Light jet print, 2011
나토리시_야마하(12.5m), Light jet print, 2011
리쿠젠타카타_혼다(16.7m), Light jet print, 2011
나토리시_공동묘지(14.7m), Light jet print, 2011
나토리시_사진관이 있던 자리(14.7m), Light jet print, 2011
찍다가 죽을 뻔한 사진, Light jet print,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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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업 노트
며칠간 지속된 원인모를 두통이 멎고 나서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35도를 웃도는 더위가 지배하는 이 여름의 끝자락에서 태풍13호는 꽤 반가운 소식이었다. 하늘은 벼락으로 땅을 윽박질렀고, 두툼한 빗줄기로 사람들의 발걸음을 더디게 하는 일주일이었다. 티브이에서는 약속이라도 한 듯이 일본 동북 지진 발생 6개월을 즈음하여 여러 채널들로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방영했다. 하지만 텔레비전 프로그램의 특성상 지진이후 일상생활의 변화 같은 모습이나 애써 희망과 감동을 보여주기 위한 억지 설정들로 전파를 낭비하는 것 같았다. 내년 3월11일이 되면 좀 더 나은 프로그램을 볼 수 있을까? 카네코**(아빠)와 카네코 마리(딸. 생존해 있다면 60세 전후)의 인생을 한 조각이라도 유추해보기 위한 단서는 어디에도 없었다. 몇 만 명이 죽고 사라진 곳에서, 피도 섞이지 않은 사람이 앨범하나 들고 한명의 인생을 역추적 하는 것이란 만만한 게 아닐 거라는 생각은 했었다. 하지만 앨범을 발견한 그날 이후 개인 작업을 위한 지진 지역의 촬영보다는 이 앨범의 주인공에 대한 정보와 호기심이 샘솟아 한 달에 한번 미야기(宮城)현 북부와 이와테(岩手)현 남부를 찾게 되었다. 동북 고속도로를 달리다보면 어쩔 수 없이 후쿠시마를 지나게 되는데, 후쿠시마에 위치한 휴게소에는 다른 곳에 비해 사람이 훨씬 적게 보인다. 최근 누구도 제대로 겪어보지 못한 방사능에 대한 공포는 사람들의 여유마저 흉흉하게 만드는 듯하다.
일본이라는 나라의 지리적 특성상 미세한 지진은 많이 겪었었지만 이번에 겪은 지진은 차원이 틀린 공포심과 두려움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다. 지진 몇 시간 후 동북지역을 강타한 거대한 쓰나미는 자연 그 자체의 경외감 내지는 인간이란 존재의 나약함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한 경험이었다. 블록바스터 영화보다 더 충격적이고 상상을 뛰어넘는 장면을 거실에서 티브이를 통해 실시간으로 본다는 것은 충격 그 자체였다. 대학원 시절 CNN을 통해 본 911테러를 뛰어 넘는 충격이었다. 사흘 후 나는 촬영을 위해 막심한 정체상황, 통제된 도로를 지나 쓰나미 현장(千葉북부에서 茨城북부)을 찾았었다. 하지만 모든 것이 멈춘 풍경과 현실적인 애로사항으로 인해 눈으로만 보고 촬영 현장을 입력을 한 채 동경으로 되돌아 왔다. 그날 답사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곳곳의 땅바닥에 흩어져 있거나 바람에 날리는 주인 없는 사진들이었다. 그 사진들은 잔해더미와 진흙에 묻혀 찢어지고 훼손되어 있었고, 심한 악취와 함께 버려져 있었다. 순간 나는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재난의 현장 속에서 처참한 환경의 감상이나 그에 따른 인간적인 번뇌를 느끼기보다는 우리의 삶속에서 사진이라는 의미를 되짚고 고민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손톱만한 칩의 데이터만 있으면 수천 장의 사진을 몇 분 만에 뽑을 수 있는 이런 편리한 시대에 한 장의 훼손된 사진을 쓰다듬으며 입김을 불어 닦고 있는 모습은 가희 놀라운 장면이었다. 더욱이 이곳은 화려한 디지털 사진 기술의 진화를 선도하는 일본 아니었던가.. 생사를 알 수 없이 사라진 가족들, 떠내려 간 집과 자동차, 흔적도 없이 사라진 예물시계..그런 것들을 제쳐두고 지금 현재 가장 찾고 싶은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가족 앨범’이라고 대답하는 사람들의 인터뷰가 인상적이었다. 가족사진. 그 누구도 그 어떠한 것으로도 다시 돌이켜 가질 수 없는 물건. 그것이 바로 사진인 것이다.
카네코 마리씨의 행방은 10개월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알 수 없다. 지진 발생 후 인터넷에 올라오던 사망자 명단들도 시간이 지날수록 여러 가지 문제점(보험,재산권,사기등)으로 인해 웹상으로는 확인 할 방법이 없게 되었다. 가족이나 친척이 아니면 특정인의 생사를 확인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배너가 떠 있을 뿐이었다. 게다가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 땀 흘리기에도 벅찬 사람들에게 일일이 수소문 하며 다니는 것도 양심적인 가책을 느끼게 했고, 시간을 쪼개 한정적인 시간으로 자원봉사를 하는 사람들도 인수인계가 제대로 되지 않아 사진과 이름만으로 생사여부를 수소문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워 보였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정부차원의 대대적인 복구는 점차 진행되었고, 무너진 잔해들과 함께 주인 없는 물건들 그리고 사진들이 불 태워지고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이라곤 그저 변하는 풍경을 기록하던지 아니면 잔해들 속에서 버려진 사진들을 줍고 수습해 멍하게 보는 것이었다. 주인 없이 버려진 사진들이지만 잔해더미와 함께 사라지는 것이 안타까웠기 때문이다.
또 앨범을 바라본다. 사진을 찍은 사람은 말이 없고 사진을 찍힌 사람도 고요하고 다시 말해, 사진은 앨범 속에서 가만히 있을 뿐인데, 앨범을 보는 나는 온갖 상상에 빠진다. 쓰나미에 다 떠내려간 집터에 우두커니 앉아서 담배 한 모금을 길게 내품는 아저씨. 이제는 눈물도 말라버려 초점 흐린 눈동자로 행방불명된 아내의 사진 한 장만 있으면 좋겠다는 말이 내 귀를 찌르고 볼 살을 진동시킨다. 영정으로 쓸 사진조차 없어서 얼굴 없이 묻혀버린 수많은 시신들. 우리의 삶에서 과연 사진이 무엇이란 말인가.
오늘도 무작정 짐을 챙긴다. 고속도로를 달리는 여섯 시간 동안이 이번 촬영에서 찍고 싶은 것, 찍어야 할 것,지난 촬영 때와의 변화 등을 생각하고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이다. 막상 피해지에 카메라를 세우고 서면 모든 상황과 풍경이 혼란스러워 제정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촬영 전 시내 서점에 들러 이번 지진을 주제로 한 사진집, 잡지 등을 찾아보고 체크하지만 그건 결국 촬영장소의 정보(위치한 지역, 촬영한 날짜)외에는 별다른 감흥을 느낄 수 없다. 유튜브에서 동영상을 보는 것이 훨씬 더 효과적이다. 사진가라면 누구나 다 고민하는 지점이겠지만 촬영을 할 때마다 뭔가 다른 사진을 찍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은 어김없이 짓눌러왔다. 그래서 내가 정한 촬영의 방향은 단순한 것 같지만 꽤 어려운 시도였다. 그건 사진기자들이 찍는 사진과 현지 주민들이 찍는 사진의 중간이었다. 토마츠 쇼메이(東松 照明)의 원폭 아카이브 작업들은 이번 작업의 모티브가 되었음을 밝혀둔다.
말도 통하지 않는 낮선 땅에서 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찍을 수 있는 사진이라곤 생각만큼 쉽지는 않다. 말이 필요 없는 깡통이나 책들을 찍었었고, 작가랍시고 그기에 개똥같은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혼자 진지한 척 했다. 가끔 한국에 들어가면 평소에 읽지도 않았던 작업실 한쪽에 방치된 사진 책들을 꺼내 읽으며 위안을 받으려 했다. 사진이 무엇이냐고 명확하게 말해주는 책은 어디에도 없다. 그러나 또 전시는 하게 되었다. 아마 전시장에는 내가 찍은 사진들도 있지만 내가 발견한 사진들이 더 중요한 의미를 부여할 것이다. 우연이겠지만 전시에 온 사람들 중 카네코 마리를 알거나 그 행방을 알 수 있는 사람이 있기를 기대한다.
부산으로 향하는 KTX 객실 안에서 스티브 잡스의 사망소식이 뜬다. 그리고 몇 분 뒤 나는 어머니의 치매 진단을 핸드폰 문자로 받는다. 뉴스에 놀라는 타인들의 반응들과 문자에 전해지는 개인적인 슬픔이 시속 270킬로로 달리는 열차의 차창너머로 오버랩 되면서 나도 모르게 몇 년 전 제주도 여행에서 찍었던 어머니의 사진을 꺼내본다. 비양도가 보이는 해변에서 어머니는 아주 편안하게 웃고 계신다. 어머니는 차차 좋은 추억들을 하나씩 잃어 가실 테고, 나는 그 추억들을 조금이라도 더 붙들어 두려고 사진들을 볼 것이다. 그리고 다시 카네코 마리의 앨범을 본다. 사진이란 이렇듯 자기의 것이던 타인의 것이던 보는 사람들에게 추억을 선사하며 나아가 현재 자신의 존재를 가늠하는 나침반으로서 작동한다. 또한 자신과는 전혀 관계없는 대상을 찍은 사진이라도 이내 자신의 삶과 연관시켜 그 의미를 확장해 나간다. 스마트폰이라는 것이 나오면서 사람들은 언제나 손쉽게 실시간 영상을 보며 가족들과 친구들과 통화를 하는 시대가 되어버렸다. 막대한 용량의 사진폴더에는 순간순간의 베스트 컷들만이 선택되어 저장되어 있다. 같은 시기 일본의 동북지역 어느 시골에서는 그저 아내의 사진 한 장만 남아 있다면 좋겠다는 사람이 이 시대에 공존하고 있다.
나는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것처럼 진화를 거듭하는 디지털 기술이 싫다. 그리고 무엇이던 쉽게 찍으며 쉽게 지워버리는 요즘 사람들의 세태도 싫다. 그것들은 작고 빠르고 편리하지만 찍을 때의 상황과 의미들을 머지않아 잊게 한다. 어릴 적 자전거를 한번 배우면 몇 십 년을 안타다가 타도 탈 수 있는 것처럼 사람이란 몸으로 체득한 것은 오래가지만 머리로 습득한 것은 오래가지 못한다. 핸드폰이 없던 시절 나는 수 십 명의 친구 전화번호를 외웠었는데, 지금은 아버지 핸드폰 번호도 모른다. 어디 그것뿐이랴...최근 사진은 인간이 상상하는 것 이상을 보며 진화한다고 생각하지만, 제발 내 몸이 느꼈던 것, 몸소 체험했던 것부터 다시 시작해보자. 사실, 우리들은 필름을 넣으며 무엇을 찍게 될지도 모르는 그저 바보 같은 인간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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